녹슬어가는 탱크! 탱크를 몰던 병사들은 어디가고 새 한 마리가 사수(射手) 노릇을 한다. 치열했던 격전지 진먼다오(金門島)는 격전지였던 흔적들만 남아있을 뿐 양안 관계(兩岸 關係)의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다. 한 때 10만 대군이 상주했던 금문도에서 이틀이나 머물렀지만 군인은 단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군인들이 어디에선가 금문도를 지키고 있겠지….

금문도를 돌아보면서 문뜩 우리의 DMZ를 떠올렸다. 지금 추진하는 남북의 대화가 무르익으면 우리의 DMZ에도 지금의 금문도처럼 평화가 찾아오겠구나 하는 꿈을 가져 본다.

◇ 중국 푸젠 성 코앞에서 버티고 있는 金門

타이완에서 180여㎞ 남짓 떨어져 있는 진먼은 다진먼다오(大金門島), 우저우다오(吾洲島)라고도 부른다. 중국 푸젠 성(福建省) 남동부 샤먼항(夏門港)과는 10㎞거리, 곡운섬과는 불과 1.7㎞거리다. 진먼다오의 면적은 150.3397㎢이며, 동서길이가 약 20km이고, 남북길이는 5∼10km의 섬이다. 주민은 13만 명 정도 되지만 상주 인구는 5만 명 정도 살고 있는 섬이다. 대부분 주민들은 진먼의 특산물인 진먼고량주(金門高粱酒)에서 일하거나 제조장에 납품할 고량(수수)을 재배하고 있는데 상주 인구의 50%가 공무원이라 한다.

경제적인 수준은 타이완에 비해 1/3수준이지만 행복지수는 훨씬 높다고 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확인 할 수 없었지만 주민들은 밝고 환했다. 그게 바로 행복지수가 아니겠는가.

서쪽에는 샤오진먼섬(小金門島)이 있다. 지금 한창 다진먼에서 샤오진먼으로 연결하는 연육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앞으로 2-3년 내 완공되면 진먼의 관광사업은 더욱 활성화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진먼은 원래 해적 및 밀무역의 근거지로 명(明) 때에 해적에 대비하여 성을 쌓은 적이 있고, 그 후 정성공(鄭成功)이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명의 회복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타이완으로 건너간 일도 있다. 그동안 타이완의 대륙 반공(反共) 기지로 요새화되었으나 1992년 11월부터 계엄통치를 해제하고 군사위원회를 폐지,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이 섬을 진먼(金門)이라 부르게 된 것은 명나라 초기 주원장이 나라를 지키는데 있어 해군만큼 튼튼한 병력도 없다면서 이 섬을 방어기지로 삼고 황금만큼 단단하다하여 진먼(金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 타이완관광청 서울사무소가 실시한 팸투어 일정 가운데 진먼을 중시한 것은 타이완 정부가 올해를 ‘2018海灣旅遊年’로 정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 해 백만명이 넘는 한국 여행객들이 타이완을 방문하고 있지만 이 가운데 진먼을 찾는 여행객은 극히 소수다. 이들의 여행코스 중 일부를 진먼으로 돌린다면 그 만큼 상승효과가 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수년전 진먼을 방문 한 적이 있어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지난번에는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구워먹는 식으로 다녀가서 많은 것을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비교적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6·25를 겪은 한국인들에게 진먼은 꼭 권하고 싶은 여행지다.

진먼으로 가는 길은 타이완 타이페이, 타이중, 타이난, 까오슝, 짜이 등 5개지역에서 하루 100여편의 쌍발 터보프롭 ATR72-600가 뜬다. 70여명이 탈 수 있는 쌍발 비행기를 타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다.

◇ 진먼으로 가려면 쌍발 터보프롭기 타라

진먼으로 가는 길은 타이완 타이페이, 타이중, 타이난, 까오슝, 짜이 등 5개지역에서 하루 100여편의 쌍발 터보프롭 ATR72-600가 뜬다. 70여명이 탈 수 있는 쌍발 비행기를 타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하나의 흠이 있다면 바람이 세게 불면 결항이 되기 때문에 진먼을 여핼할 때는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시간 남짓 거리를 비행하지만 마치 관광비행을 타는 기분이다. 항공요금은 우리 돈으로 편도에 10만원 내외다.

항공기 말고는 푸젠성 샤먼에서 연락선을 타면 30분이면 진먼에 닿을 수 있다.

진먼은 타이완 보다 중국 본토와 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미국과 쿠바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그래서 양안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돼 왔다고 볼 수 있다.

조랭이처럼 아님 땅콘처럼, 그것도 아니면 우리의 장구처럼 생긴 진먼의 근대 역사는 전투로 얼룩져 있다.

당시 중국이 퍼 부은 포탄은 지금 이 탄피를 이용한 칼을 만들어 진먼의 삼대 명품으로 각각광 받고 있다. 탄피를 이용한 칼 제작으로 유명해진 위정동(吳增棟, 金合利實業有限公司, 60) 사장에게 “귀한(?) 재료를 보내준 모택동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건넸더니 웃기만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전쟁 때 퍼 부은 포탄은 명품 ‘진먼 칼’로 탄생

국민당을 이끌던 쟝졔스(蔣介石:1887~1975)와 공산당이 대치하던 1949년부터 진먼은 타이완의 최전방 전쟁터였다. 중국은 진먼 상륙을 위한 대규모 군대를 투입했으나 번번히 실패하자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44일간 진먼다오에 무려 47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진먼의 지질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이를 활용한 쟝졔스는 산속에 굴을 뚫어 이 동굴안에서 포화를 막아냈다. 왜냐하면 화강암의 강도가 8도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란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후로도 21년간 대치 상황을 이어오면서, 1979년까지 약 100만 발이 넘는 포탄이 진먼다오에 떨어졌다고 한다. 진먼다오 섬의 중국을 접한 바닷가는 거의 지하벙커로 요새화 되어 있어 포화를 견딜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중국이 퍼 부은 포탄은 지금 이 탄피를 이용한 칼을 만들어 진먼의 삼대 명품으로 각각광 받고 있다. 탄피를 이용한 칼 제작으로 유명해진 위정동(吳增棟, 金合利實業有限公司, 60) 사장에게 “귀한(?) 재료를 보내준 모택동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건넸더니 웃기만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쟁당시 많은 군인들이 상주하다 보니 젊은 군인들에게 술은 필 수가 되었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금문고량주다.

‘금문고량주’야 말로 금문도를 세계에 홍보하는 일등공신이다. 진먼을 가는 이유중에 하나가 금문고량주를 마시고 구입하기 위한 우스개 소리도 있을 정도다.

진먼의 삼대 명물 중 땅콩을 빼 놓으면 섭섭해 한다. 지질적으로 논농사는 안돼도 땅콩을 재배하기엔 적합한 토질이어서 땅콩의 생산도 많지만 맛 또한 일품이다.

10만 대군은 중국 각지에서 모인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중국 각 성의 가장 훌륭한 술 제조 방식과 비결들을 결합하여 금문 주조공장만의 독특한 술 만드는 공예를 창조하게 되었다.

◇ 진먼다오에서 맛보는 ‘金門 58’ 고량주의 맛

금문도는 역사가 깊은 전쟁지역이다. 전쟁으로 인해 처참히 파괴된 적도 있었고, 전쟁 때문에 10만 대군이 이 섬에 집결했다.

당시 식량이 부족했던 것 외에도 술은 병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였다. 당시의 사령관은 군인 10만명 중에서 술을 잘 제조할 줄 아는 병사를 찾았다.

10만 대군은 중국 각지에서 모인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중국 각 성의 가장 훌륭한 술 제조 방식과 비결들을 결합하여 금문 주조공장만의 독특한 술 만드는 공예를 창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량(수수)을 내면 쌀을 지급한다는 정책을 통하여 금문도 백성들에게 고량의 재배를 권장했다. 백성들은 쌀을 지급받기 위해 당연히 서로 앞다투어 고량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생산된 많은 고량들은 고량주 제조에 사용되었으며, 제조된 고량주는 금문 본토의 군용으로 공급되었을 뿐 아니라 술에 대한 평판이 매우 좋아서 타이완으로까지 판매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52년에 구룡강(九龍江)주조장이 설립되었다. 1956년에는 금문주조공장으로 개명하여 열심히 노력한 결과 금문 지역의 경제 역시 대폭 개선되었으며 군대와 주민들의 마음을 결집하여 황무지로부터 새로운 기회를 창출해 낼수 있게 되었다.

손에 손잡고 어려운 전후 시기를 함께 극복해 오면서 사람들은 그분을 우리들의 사령관 ‘금문의 현대판 은주공(恩主公)’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사람이 바로 후롄(胡璉)장군이다.

금문고량주 회사 내 VIP 홍보관에는 이곳에서 생산된 특별한 고량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마영구 전 총리가 행사 때 이곳에 들러 직접 사인을 한 도자기 형태의 고량주도 있고, 간단한 시음도 가능하다. 특히 진먼다오의 중심으로 동서를 이은 중심도로는 고량주의 창업자인 후롄 장군이 잘사는 동쪽 사람들과 가난하게 살던 서쪽 사람들을 다 같이 잘살게 하려고 동서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과의 거리가 불과 2,100m~1,800m에 불과한 관측소에서 중국쪽을 바라보면 손이 닿을 듯 싶다. 갱도 안에는 천밀밀(天蜜蜜)을 부른 등려군도 홍보방송을 위해 이곳에서 마이크를 잡았다고 했다.

◇ 천밀밀(天蜜蜜) 부른 등려군도 갱도내에서 마이크 잡고 홍보
진먼다오는 지난 1992년 군사통제가 해제됐지만 아직도 요소요소에 전쟁유적지들이 즐비하다. 당시 전투장면의 사진과 그림, 그리고 전시에 사용됐던 용품과 자료 등이 보존된 구링토우 전사관, 중국 본토를 향해 홍보전을 펼쳤던 고성능 방송시설, 하문섬과 최단거리에 있는 지하 갱도로 이어진 마산 관측소, 각종 군사위장과 방어시설, 용감한 군인들을 기리는 기념관 등이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마산관측소에 들어가 보자. 중국과의 거리가 불과 2,100m~1,800m에 불과한 관측소에서 중국쪽을 바라보면 손이 닿을 듯 싶다. 갱도 안에는 천밀밀(天蜜蜜)을 부른 등려군도 홍보방송을 위해 이곳에서 마이크를 잡았다고 했다.

인공으로 뚫은 터널은 지하로 되어 있으며, 터널 총 길이는 174m다. 터널 끝에는 중국을 관측할 수 있는 지하 관측소 벙커가 있다. 관측소로 가는 통로는 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좁은 갱도지만 군데 군데 병영막사가 그 때의 상황을 말해준다.

사산포 진지.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해 병사 차림을 한 홍보요원들이 대포를 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적산갱도. 가을에는 이 갱도안에서 음악회가 렬린다.

진먼의 전적지 관광의 백미는 사산포진지(獅山砲陣地)와 적산갱도(翟山坑道).

사산포진지 입구에 서있던 초소 경비병은 언젠가부터 마네킹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갱도 입구에 진동(震動)이란 글귀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지하 갱도는 화강암을 뚫어 만든 굴로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가 상당히 넓게 뚫려 있으며 도처에 탄약(모형)이 적재되어 있고, 당시에 사용하던 무기들 작전회의실 등이 보존되어 있다.

갱도 끝 부분에서는 매일 포사격 재현 퍼포먼스가 펼쳐져 관광객들에게 당시의 긴박감을 느끼게 해서 재미를 더해준다. 군인은 아니지만 군인처럼 절도 있는 동작으로 대포를 쏘는 동작이 마치 군인 같다. 전에는 진짜로 포를 쏘는 것처럼 소리가 제법 크게 났는데 중국측 항의로 지금은 작은 소리만 난다. 기대했던 관광객들은 그저 웃음을 터트릴 뿐이다.

따샨깡따오(翟山坑道)는 1961년부터 5년간 화강암을 뚫고 건설된 갱도다. 이 터널은 바다와 연결된 375미터 공간에 42대의 군함을 수용 가능한 곳으로서 금문도 내 수많은 터널 중에서도 독특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10월31일에는 갱도내에서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글·사진 김원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