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의 취중진담] 건배사는 짧을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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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원하기자, 몽골

공식적인 연회에서 모두가 건배하는 모습은 보기에 화기애애해서 좋다.

이 때 사회자는 대개 환영사나 축사 같은 것을 하지 못한 VIP에게 건배를 제의 해줄 것을 요청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건배를 제의 받은 사람이 ‘이 때다’ 싶어 건배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다. 마치 축사를 하지 못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 중언부언(重言復言) 하는 건배사를 듣다 보면 짜증이 날 때도 있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건배는 식사를 하기 전에 하는 것이 보통인데 건배를 제의 받은 사람이 눈치도 없이 건배사를 길게 하면 들었던 술잔을 도로 내려놓는 경우도 생긴다.

이와는 반대로 간단하면서 연회에 참석한 모두를 즐겁게 하는 건배사도 의외로 많다.

건배사는 때와 장소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고, 너무 진지하거나 무거운 내용보다는 가벼운 뜻과 함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할 수 있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그리고 건강, 발전, 행운 등을 비는 문구를 주로 사용하면서 형식적이고 딱딱한 문구의 사용은 피하면 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크든 작든 이런저런 모임에서 뜻하지 않게 건배(乾杯)를 제의 받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어 재미있는 건배사 몇 개정도는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재미있는 건배사를 했을 경우 자리의 여흥을 더하고 모임 분위기를 주도 하여 일약 스타(?)가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만큼 다양한 건배사를 생산(?)하는 나라도 드물 것 같다. 미국은 ‘Cheers!’나 ‘toast’, 중국은 건배(干杯:Gānbēi) 또는 수의(随意:suí yì), 일본은 건배(乾杯·乾盃:かんぱい) 정도다. 여기에 친구를 위한다든가, 건강, 행복 등을 붙인 간단한 건배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우리의 ‘위하여’와 같다고 보면 된다.

영국 연방국가의 건배사는 ‘To the Queen’이 일반적이고, 영국 해군은 지난 200년간 토요일 만찬에서 건배할 때마다 ‘우리의 아내와 애인을 위하여(To our wives and

sweethearts)’를 외쳤다고 한다. 이 건배사는 영국 해군 중 가장 오래돼 유명한 건배사인데 선창자가 이렇게 외치면 화답으로 ‘그들이 절대 서로 만날 일이 없길(May they never meet)’이라는 장난스러운 대구가 따라오곤 했다고 하는데 이 건배사는 사용이 금지되고, 대신 ‘우리의 가족을 위하여(To our families)’를 써야 한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지난 7월 26일 文 대통령이 시민들 최저임금·취업난의 고민을 듣는 ‘퇴근길 국민과의 대화 일환’으로 열렸던 자리에서 ‘쌍쌍호프’ 대표 이종환 씨가 건배를 제의하며 “대한민국 사람들 다 대통령께서 아끼고 사랑해달라며 ‘아싸’라고 (건배사를) 했고, 참석자들도 다 같이 ‘아싸’를 외쳤다” 한다.

건배사는 대중이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정도가 무난하다. 여직원이 있는 회식자리에서 아무리 뜻이 좋다고 해도 ‘성·기·발·기’라는 건배사를 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을까.*(성)공 (기)원, (발)전 (기)원

지방 어느 공무원(동장)이 2016년 11월 여성 33명 등 모두 38명의 통장 등과 식사를 하면서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 표현이 들어간 ‘잔대 ××’라는 내용의 건배사를 했다가 재판에 넘겨져 곤혹을 치렀다는 뉴스가 나왔다. 법원은 “야한 건배사라도, 성적 수치심을 안주면 성희롱이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렸다지만 이런 건배사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특히 남성들만 모인 회식자리에서는 성희롱성 건배사가 ‘분위기를 띄워주는’ 역할로 인기를 끌지 모르지만 요즘 남성들만 모이는 회식자리 보담 여성들이 함께 참석한 자리가 더 많은 편이다.

한 취업포털에서 직장인들 800여명을 대상으로 회식 자리에서 건배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이 절반(51%)을 넘기도 했다는 통계를 보면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건배사도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다.

어느 포털에 떠 있는 신입사원의 건배사다.

선창자가 ‘미사일’ 하면 ‘발사’로 화답하는 것. 미사일은 ‘미래를 위해, 사랑을 위해, 일을 위해’라는 뜻으로 선창자가 ‘미사일’하고 말하면, 다 같이 ‘발사’로 화답하는 건배사다.

이런 건배사도 재미있다.

초고령 사회를 맞는 작금의 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배사는 ‘9988234’가 아닐까.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이틀만 아프고 3일째 죽는다. 꿈같은 이야기다.

글: 김원하 칼럼/ 취중진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