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Macho 칼럼니스트) 1960년 5월 23일, 이스라엘 첩보 기관 모사드 독일지부에 한 통의 비밀전문이 도착한다. “탈출한 영혼과 이스라엘로 돌아간다고 톨스토이에게 즉시 전해라.” 탈출한 영혼은 아돌프 아이히만, 톨스토이는 독일 프리츠 바우어의 암호명이다. 비밀전문엔 이스라엘 법무부 장관의 서명도 있었다. 모사드의 작전은 추적한 지 3년 만에 아이히만을 체포했고 뉴스는 바로 바우어에게 전달됐다. 이보다 약 한 시간 전 이스라엘 벤 구리온 총리가 이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렸다.
약 한 달 전, 모사드 비밀요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 아이히만 집 근처에 도착한다. 요원들은 매일 아이히만의 동선, 출퇴근 시간을 확인하고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서 납치하기로 한다. 5월 11일 밤, 예정된 버스에 아이히만이 없어 당황하는 요원들 눈에 다른 버스에서 내리는 그가 보였다. 한 모사드 요원은 길을 걷던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자 직감적으로 도망가려는 그를 다른 요원들이 덮쳤다. 몸싸움 끝에 그를 자동차에 바닥에 눕혀 담요로 덮었다. 가짜 외교관번호판을 탄 렌터카는 경찰의 검문을 피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택가 모사드의 안가에서 요원들은 몇 일간 조사한 끝에 그가 진짜 아이히만이란 것을 재차 확인한다. 이때 요원들은 나치 정권에서 유대인을 생체 실험하고 학살한 악명 높은 의사였고 역시 가명으로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고 있던 요제프 맹겔레 체포계획도 있었으나 그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실패한다.
5월 20일 밤, 약물에 취한 아이히만과 요원들은 민항기 조종사 복장으로 검문을 피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공항에 잠입한다. 공항엔 며칠 전 아르헨티나 독립 150주년 축하 대표단을 태우고 왔던 엘-알(El-Al) 이스라엘 국영 항공기가 이륙 준비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아이히만을 송환할 핑계로 갑작스러운 대표단 방문 행사도 모사드 작품이었다. 눈치채고 추적하는 경찰을 따돌리고 비행기는 극적으로 이륙했고 중간 급유를 거쳐 22일 이스라엘에 도착한다. 불법 납치송환 뉴스는 아르헨티나 정부를 매우 격분시켰고, 나치 전범들을 두둔했던 아르헨티나 극우주의자들의 반유대인 감정을 더욱 확산하게 했다.
몇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수백만 명의 유대인 집단학살, 홀로코스트를 기획 실행했던 악명 높은 나치 친위대장 아돌프 아이히만은 1945년 나치가 패망하자 가짜 장교 신분증으로 미군에 체포된 지 몇 달 만에 탈출한다. 그 후 나치 동조자의 도움을 받아 리까르도라는 가명으로 국제적십자사의 인도주의 여권을 발급받아 아르헨티나 정부의 이민허가를 받아 정착한다.
서독의 고위직 검사 프리츠 바우어(Fritz Bauer)는 유대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930년 27살에 독일 역사상 가장 어린 법조인이 된다. 그러나 나치 정권이 들어서며 유대인수용소로 끌려가 노동도 했다. 결국 덴마크 등으로 피신했다가, 종전 후 독일로 돌아와 검사로 근무한다. 히틀러의 심복들을 추적하고 은폐된 범죄사실을 찾아내 법정에 세우는 그를 당시 나치 잔당이 장악했던 서독 정부는 달갑지 않아 했다. 나치 범죄자를 수사하고 처벌하려는 그가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그가 수집한 증거와 수사한 서류들은 없어졌고, 구속영장은 번번이 기각됐고, 검사였지만 끊임없이 살해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법원 내에서 철저히 외톨이였다.
1957년 바우어는 범죄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고 있다는 구체적인 첩보를 지인으로부터 얻는다. 즉시 이스라엘 모사드에게 첩보를 알려줘 아이히만을 전범재판정에 세우는 데 일조한다. 이유는 당시 서독 법정에서는 증거 부족 핑계로 풀려날 확률이 커 이스라엘로 정했다. 바우어는 종전 후 많은 방해를 무릅쓰고 나치 정권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한 처벌과 보상하는 법을 만들려 수년간 노력했다. 결국 프랑크푸르트 아우츠슈비츠 재판이 1963년 열리게 된다.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해 무조건 항복 선언한 독일은 베를린부터 반으로 소련이 동독, 미국, 영어, 프랑스는 서독으로 4개 연합국의 분할 통치가 시작된다. 미국은 독가스 개발 등 고급정보를 제공한 나치 잔당들이 처벌을 피하고 서독 정권을 장악하는 걸 묵인했다. 미국이 한국인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마루타 생체실험, 세균무기 등 자료를 제공한 패망한 일본 731부대 관련자들을 처벌 안 한 것 같은 경우다. 소련을 침공한 나치에 대한 복수 때문인지 오히려 소련이 통치하던 동독은 나치 잔당들을 확실히 처벌했다.
바우어는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에서 독일 역사상 최초로 22명의 나치 친위대 전범을 법정에 세웠으나 단 6명만 종신형을 받는다. 1945년부터 약 십이만 여건의 나치 범죄를 기소했으나 약 500여 명만 실형을 받을 정도로 서독 정권은 처벌에 소극적이었다. 그 분위기가 나치 범죄자를 법정으로 이송한 경찰이 옛 상관이던 그들에게 거수경례할 정도다. 나치가 전쟁 기간 중 벌인 만행을 거의 몰랐던 서독 국민들은 이 재판 덕에 드러난 나치의 생체실험과 유대인 집단학살 같은 잔혹 범죄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이 재판이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받는 건 많은 전쟁범죄자를 처벌하는 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즉시 이스라엘 총리에게 감형을 청원했으나 기각된다. 체포 당시 본인임을 자백하는 대가로 약속한 대로 마지막으로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한 달 후 새벽 갇혔던 교도소 형장. 성직자, 기자 등 몇 명이 보는 앞에서 그의 교수형이 집행됐다. 당시 나이 57세로 체포된 지 2년쯤 지난 때였다. 곧바로 화장한 재는 이스라엘 영해 밖 대서양에 뿌려졌다.
요제프 맹겔레는 단정하게 빗은 머리와 잘 다려진 나치 군복을 입고 항상 미소를 지며, 유대인들, 특히 쌍둥이 아이들을 유인해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상체 실험하고 아우츠슈비츠 가스실에서 학살한 ‘죽음의 천사’였다. 그는 나치가 패망하자 추적을 피해 여러 곳으로 도망 다니다 나치 잔당들의 도움으로 국제적십자사의 인도주의적 가명 여권을 받아 아르헨티나에서 목수로 살아간다. 몇 년 후 가족 행사로 서독의 고향 집을 방문했을 때 바우어의 체포영장이 기각되는 등, 서독 정부는 이런저런 핑계로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모사드의 추적은 계속됐고 이스라엘 정부의 압력에 아르헨티나 정부도 결국 그의 체포영장을 발부했으나, 나치 추종세력이 도와 브라질, 우루과이 등 이웃 국가로 도망 다녔다. 67세가 되던 1979년 상파울루 근교 한 리조트에서 지인들과 수영 중 의문의 심장마비로 익사했다.
1968년 하쎈주 지방검사였던 바우어는 프랑크푸르트 자택 욕실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평생 독신이던 그의 나이 64세 때였다. 경찰은 수면제 과다복용 익사 또는 자살이라고 발표했으나, 서독국민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사무실에서 민감한 서류들이 사라졌다. 바우어 덕분에 전후 서독은 독립된 민주주의 사법체계가 들어섰고, 나치 전범에 대한 형사법이 개편될 수 있었다. 그는 유명한 독일 철학자와 인권 협회인 Humanist Union을 결성한다. 그의 사후, 협회는 Fritz Bauer Prize의 재정을 돕는다. 그리고, 1995년 역사와 유대인 학살을 연구하는 비영리 교육기관 Fritz Bauer Institute가 설립된다.
2015년 바우어의 활동을 담은 Der Staat gegen Fritz Bauer란 독일영화가 나왔다. 국내에서는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란 제목으로 스크린을 탔다. 2016년 영국 언론 인디펜던트지는 석연치 않은 그의 죽음을 심층 보도했다.
최근에 비밀 해제된 모사드 문서에 따르면, 아이히만 체포 당시, 맹겔레도 추적 중이었으나, 둘 다 비밀리에 체포해 송환하는 것은 비밀작전을 노출될 위험부담이 커 맹겔레납치는 중지했단다. 몇 해 전 독일의 나치 범죄수사국은 70여 년 전 아우슈비츠 수용소 경비병으로 근무했던 97세 노인을 헝가리에서 체포해 법정에 세웠다.
1977년 이스라엘 정부는 나치 전범을 찾기 위해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 민간기관 형식인 Simon Wiesenthal Center를 세워 유대인 학살 관련 자료를 연구하고 나치 전범자를 추적하고 있다. 전범자들은 잡혀 감옥에서 죽던지, 도망 중 여러 이유로 결국 죽는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과 이스라엘 정부는 나치 잔당들을 찾아내 법의 심판대에 세우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난 수십 년간 불법적인 이득을 위해 정권과 결탁, 타협한 고위직 판검사들이 버젓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또한, 아직도 친일파 축적 재산환수를 방해하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인명사전을 반대하는 친일파 후손 및 그 추종세력들이 활개 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