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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돌아가신 분 욕보이면 패륜”…박정희에 씌운 상상력, 노무현 앞에서도 당당한가

정치인이 고인 들추면 ‘패륜’이고 영화가 실존 인물 죽음에 가설 얹으면 ‘예술’인가…190억 상업영화와 ‘창작의 자유’라는 이중잣대

암살자들 역사왜곡 논란을 불러온 영화 암살자들의 한 장면
영화 《암살자(들)》 스틸. 실제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작품을 둘러싸고 역사왜곡과 창작의 자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절묘하고도 씁쓸한 데칼코마다. 극장가에서는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다룬 영화 《암살자(들)》을 놓고 ‘역사 왜곡이냐, 창작의 자유냐’는 설전이 한창인데, 바로 옆 여의도 정치권에서도 고인을 둘러싼 공방이 불붙었다.

《암살자(들)》 역사왜곡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금품수수 의혹을 다시 거론한 무소속 한동훈 의원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신 분이니 맘대로 욕보여도 된다는 말이냐.”

윤 의원은 이를 ‘정치적 이익을 위해 고인을 욕보이는 패륜적 행태’라고 규정했다. 한 의원은 자신의 주장이 사실이라며 맞받았다.

여기서 누구의 주장이 법적으로 옳은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눈길을 멎게 한 것은 윤 의원이 내세운 단 하나의 명제다.

‘돌아가신 분을 욕보이는 것은 패륜이다.’

지극히 온당한 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무덤 속에서는 어떤 반론권도 행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원칙은 사람에 따라 휘어지는 고무줄인가, 아니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작동하는 보편적 규범인가.

노무현에게 적용되는 그 엄격한 잣대가 박정희와 육영수 앞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가. 정치인이 실존 고인의 과거를 들추면 ‘패륜’이 되고, 영화가 비극적인 죽음에 강렬한 가설을 얹으면 ‘표현의 자유’라는 말로 모든 논쟁이 끝나는가.

영화 암살자들 속 기자들과 취재 현장 장면
영화 《암살자(들)》의 한 장면.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극영화가 어디까지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놓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역사 왜곡의 반대말은 창작의 자유가 아니다

개혁연구원이 지난 9월 29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가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배후에 의문을 제기한 것을 ‘역사 왜곡’이라고 본 응답은 58.2%, ‘창작의 자유’라고 본 응답은 27.6%였다.

그런데 이 질문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 왜곡의 반대말이 창작의 자유인가.

두 개념은 애초에 대립항이 아니다. 어떤 작품이 역사를 왜곡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작품을 만들고 상영할 자유는 인정할 수 있다. 반대로 법적 금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실존 인물의 삶과 죽음을 가지고 어디까지 상상해도 되는지는 엄격하게 따질 수 있다.

오히려 눈길이 가는 것은 같은 조사의 다른 결과다.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영화가 실제와 다른 가설이나 상상을 어디까지 담을 수 있는지를 묻자 46.0%가 ‘실존 인물의 명예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해야 한다’고 답했다. ‘허구임을 밝히면 허용해야 한다’는 응답은 22.9%였다.

사람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논점은 상상할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실제로 살았던 사람의 삶과 죽음에 어디까지 상상력을 집어넣을 수 있느냐.

영화 암살자들 제작진과 출연진
영화 《암살자(들)》 제작진과 출연진. 190억원 규모의 상업영화를 둘러싼 논쟁은 작품을 넘어 실존 인물을 다루는 창작의 책임 문제로 번졌다.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허구입니다’ 한 줄이면 정말 끝나는가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다. 허진호 감독은 영화 속 ‘중정 윗선’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분리해 설정했다고 설명했고, 박 전 대통령이 육 여사를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으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좋다. 그 설명은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렇다고 질문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실제 대통령과 영부인, 실제 날짜와 실제 사건을 가져왔다. 그 위에 영화적 가설과 상상력이 올라간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암살자들 역사왜곡 논쟁이 시작됐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작품의 여러 장면이 당시 권력기관의 개입 가능성을 넘어 박 전 대통령까지 연상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감독은 그 해석을 부인한다. 그렇다면 더욱 중요한 것은 관객이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 그리고 허구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가상의 대통령과 가상의 영부인, 가상의 정보기관을 만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러나 실제 이름과 실제 비극을 가져오는 순간 작품은 실제 역사가 가진 사실성과 무게를 함께 가져온다.

역사에서 그 힘을 빌려왔다면 역사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

박정희의 자리에 노무현을 대입해 보라

역지사지의 사고실험을 해보자. 영화 속 박정희라는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노무현을 대입해 보라.

배경은 봉하마을이다. 실제 날짜와 실존 정치인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사실의 여백마다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밀담과 확인되지 않은 배후를 만들고, 비극적인 죽음에 누군가 개입했을지도 모른다는 복선을 깔아둔다.

그리고 영화 첫머리에 한 줄을 띄운다.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나 허구로 재구성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되는가.

그때도 우리는 지금과 똑같이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 창작의 자유를 존중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대목에서 불쾌감이 스친다면 바로 그 불쾌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아끼는 지도자의 죽음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고, 내가 증오하는 지도자의 비극은 상업적 음모론의 먹잇감으로 던져줘도 무방한가.”

못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는 영화 소재가 넘쳐난다. 어느 진영의 정치인이든 공개적으로 제기된 의혹과 실제 사건 몇 개를 가져온 뒤 그 사이의 빈칸에 작가의 상상력을 집어넣으면 얼마든지 자극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잘 만들면 재미도 있을 것이다. 유튜브도 시끄러워질 것이다. 정치권도 달려들 것이다.

그런데 왜 하지 말아야 하는가.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이 있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다.

상상할 수 있다는 것과 해도 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죽은 사람은 반론할 수 없다

죽은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말을 못 한다.

영화가 개봉해도 기자회견을 열 수 없다.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반박할 수도 없다. SNS에 해명문을 올릴 수도 없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다룰 때는 살아 있는 사람을 다룰 때보다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라고 예외일 이유가 없고 노무현이라고 특별대우할 이유도 없다.

비판할 사실이 있다면 사실로 비판하면 된다. 박정희의 유신을 비판하고 싶으면 유신을 이야기하면 된다. 인권침해를 이야기하고 싶으면 실제 인권침해를 보여주면 된다. 경제개발과 산업화에 대한 평가 역시 사실을 놓고 논쟁하면 된다.

역사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무겁다.

영화는 끝나도 머릿속 장면은 남는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다음 세대다. 1974년을 살아보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육영수 피격 사건은 자신의 기억이 아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역사다.

그들에게 영화가 그 사건을 처음 만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두 시간 동안 실제 이름과 실제 시대, 실제 사건을 본 뒤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갔다고 머릿속에서 ‘여기까지 사실, 여기부터 허구’라는 칸막이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감독에게는 두 시간짜리 영화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젊은 관객에게는 그것이 육영수 피격 사건을 처음 만난 두 시간일 수 있다.

영화는 끝나지만 영화가 남긴 장면은 오래간다.

그리고 190억원

창작의 자유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자주 빼놓는 것이 하나 있다.

돈이다.

영화는 예술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산업이다. 《암살자(들)》의 제작비는 약 190억원으로 알려졌다. 10월 3일에는 개봉 11일 만에 누적 관객 200만명을 넘어섰다. 업계에서는 손익분기점을 약 370만명 안팎으로 추산하지만 공식 확정 수치는 아니다.

190억원이 들어간 상업영화에서 흥행은 현실의 문제다. 그렇다고 이번 정치적 논란이 흥행을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다만 논란이 커지면서 영화 제목이 정치권과 언론, 유튜브와 SNS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까지 제목을 반복해서 부르는 기묘한 상황이다.

모두가 싸우는데, 결과적으로 모두가 영화를 말하고 있다.

논란이 흥행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논란이 돈을 주고도 쉽게 살 수 없는 관심과 노출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까지 외면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190억원짜리 상업영화를 놓고 창작의 자유만 이야기하는 것도 어딘가 부족하다.

사람이 바뀌면 원칙도 바뀌는가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가 보자.

윤건영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고 ‘돌아가신 분이니 맘대로 욕보여도 된다는 말이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 말을 그대로 돌려 묻고 싶다.

그 원칙은 노무현에게만 적용되는가. 박정희도 죽었다. 육영수도 죽었다. 이승만도, 김대중도 죽었다.

어느 쪽 사람이든 죽은 사람에게는 같은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사람을 바꾸는 순간 원칙까지 바뀐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다.

박정희를 좋아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박정희를 미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독재와 인권 탄압, 유신의 과오는 사료와 사실을 통해 비판하면 된다. 반대로 그의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 역시 사실과 자료를 놓고 논쟁하면 된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간단하다.

박정희에게 적용한 기준은 노무현에게도 적용하고, 노무현에게 적용한 기준은 박정희에게도 적용하자. 김대중에게 적용한 기준은 이승만에게도 적용하자.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창작의 자유는 소중하다. 그러나 창작의 자유가 역사왜곡의 반대말은 아니다. 창작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무엇을 상상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독하고, 더 충격적이고, 더 재미있는 음모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해서는 안 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있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암살자(들)》을 옹호하며 ‘창작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이것 하나만 묻고 싶다.

당신이 박정희에게 허용한 상상력을, 당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도 허용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면 적어도 원칙은 같다.

그런데 사람을 바꾸는 순간 답이 달라진다면, 문제는 영화가 아니다.

그때부터는 그 ‘원칙’을 한번 의심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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