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국 엘리트 스포츠, 길을 묻다 ③·끝]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을 통해 한국 체육의 위기와 전환, 그리고 선수 중심의 새 시스템을 묻는 3부작 기획의 마지막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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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던졌던 마지막 질문은 단순했다. 국가의 일방적인 호통과 군대식 희생이 끝난 자리, 이제 도대체 무엇으로 선수를 뛰게 할 것인가.
답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구시대의 애국심을 다시 소환해서는 안 된다. “태극마크를 달았으니 입술 깨물고 참아라”, “나라의 위신을 위해 뼈를 깎아라”는 말로 청춘들을 몰아붙이던 시절은 진작에 막을 내렸다. 끝난 것이 온당하며, 결코 두 번 다시 돌아가서도 안 될 부끄러운 과거다.
그렇다고 세계 정상에 오르는 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100m에서 0.01초를 깎아내고, 70m 밖 과녁 한복판에 화살을 꽂아 넣으며,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마지막 30초를 버텨내는 고통은 여전하다. 제 한계를 스스로 밀어붙여 넘어서야 하는 엘리트 스포츠의 치열한 본질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는 오직 하나다. 예전에는 위계와 강압으로 억지로 시켰다면, 이제는 선수가 제 발로 뛰어들게 만들어야 한다. 그 든든한 판을 깔아주는 것이 바로 시스템이다.
한국 스포츠의 위기를 따지려면 메달 집계표 대신 선수들의 주민등록증과 통장 잔고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대한체육회가 국회에 낸 자료를 보면 대한민국 운동선수의 평균 은퇴 나이는 23.6세다. 은퇴한 선수 10명 중 4명가량(38.19%)은 사실상 무직 상태로 남는다. 취업을 지원한다는 선수진로지원센터가 버젓이 있어도 이용률은 4명 중 1명 수준에 그친다.
이 기막힌 숫자 앞에서 무슨 낯으로 국위 선양을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스물서너 살에 운동을 그만두면 당장 내일의 밥벌이조차 막막한 절벽인데, 파릇한 스무 살 청년더러 “세계 1등을 해야 하니 청춘을 모조리 갈아 넣으라”고 다그치는 것은 국가의 무책임한 방기다.
과거에는 통했다. 메달 하나만 목에 걸면 집안 살림이 폈고, 평생 연금에 실업팀과 지도자 자리로 이어질 사다리가 지금보다 넓었다. 운동만 잘하면 사회가 어느 정도 뒤를 책임져준다는 믿음도 있었다. 지금 젊은 선수들은 다르다. 내 땀과 관절을 바친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묻고, 링과 매트에서 내려온 뒤 살아갈 남은 반평생의 삶을 진지하게 계산한다. 이걸 두고 “요즘 선수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다”며 혀를 찰 텐가. 틀렸다. 내 삶을 스스로 지키려는 청년들의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눈뜸이다.
“스물셋에 운동을 끝내면 인생 전체가 무경력 낙오자로 밀려나는 사회에서, 어떤 부모가 안심하고 자식에게 엘리트 선수의 길을 권하겠는가. 새 엔진은 선수에게 더 큰 희생을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운동에 청춘을 바쳐도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회적 믿음을 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선수들을 다시 치열한 경쟁의 사선에 세우려면 푼돈 몇 푼 쥐여주는 일회성 포상금 타령부터 멈춰야 한다. 가장 확실한 보상은 훈련장에서 뒹군 수만 시간이 은퇴하는 날 아침 ‘사회적 무경력자’라는 낙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든든한 확신이다. 국가대표 출신이든, 이름 없는 실업팀에서 청춘을 바친 선수든, 그 치열했던 경험 자체가 사회에서 통하는 진짜 경력이 되어야 한다. 왜 다들 바늘구멍 같은 지도자 자리 하나만 쳐다보며 목을 매게 만드는가. 스포츠 데이터 분석, 선수 전문 재활, 체육 행정, 심판, 유소년 클럽 운영, 시설 관리, 스포츠마케팅과 콘텐츠까지 길은 얼마든지 낼 수 있다. 은퇴할 때가 돼서야 허겁지겁 내미는 퇴직 대책 말고, 운동을 시작하는 날부터 학업과 직업 훈련을 함께 굴리는 ‘듀얼 커리어’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
비인기 종목을 지탱해 온 지자체와 공기업 실업팀도 체질을 뜯어고쳐야 한다. 지자체장이 바뀌면 팀 존폐가 흔들리고, 전국체전 성적이 떨어졌다고 지원 예산을 깎아버리는 판에 어느 선수가 자신의 미래를 마음 놓고 걸겠는가. 실업팀 평가는 금메달 몇 개 건졌느냐로 줄 세울 일이 아니다. 선수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고용하는지, 다쳤을 때 제대로 치료해 주는지, 은퇴 이후 진로를 어떻게 준비시키는지까지 따져야 한다. 메달만 찍어내는 하청 공장이 아니라, 당당한 하나의 전문 직업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뜻이다.
선수를 길러내는 입구도 넓혀야 한다. 어릴 때 학교 운동부 합숙소에 들어가지 못하면 평생 태극마크 근처에도 가기 어려운 낡은 외나무다리로는 아이 울음소리마저 줄어드는 대한민국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다. 동네 스포츠클럽에서 취미로 공을 차고 활을 쏘다가 뒤늦게 재능을 발견해도 얼마든지 전문 선수와 국가대표에 도전할 수 있는 열린 길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풀뿌리 저변이 살고 선수층도 두터워진다.
여기에 현대 스포츠의 진짜 무기인 과학을 붙여야 한다. 스포츠과학을 진천선수촌에 모인 몇몇 국가대표들의 전유물처럼 묶어둬선 안 된다. 어린 유망주 시절부터 신체 발달과 근력, 회복 속도, 부상 위험, 경기 중 체력 저하까지 데이터를 꼼꼼히 축적해야 한다. “한 바퀴 더 뛰어라”, “정신력으로 버텨라”는 주먹구구식 호통 대신, 왜 이 훈련을 해야 하는지, 지금 이 강도를 몇 분 더 버텨야 경기 후반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어떤 움직임이 부상 위험을 키우는지를 숫자로 설명해야 한다. 자기 몸의 원리를 데이터로 이해한 선수는 억지로 끌려가지 않는다. 제 발로 치열한 훈련 속으로 뛰어든다.
그렇다면 지도자의 얼굴도 바뀌어야 마땅하다. 과거에 메달 하나 땄다고 자동으로 지휘봉을 쥐여주던 낡은 관행부터 버려야 한다. 요즘 선수들은 감독이 “뛰어”라고 소리치면 “왜 뛰어야 합니까”라고 되묻는다. 그 질문에 핏대를 세우고 군기를 잡는 이는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데이터를 읽고, 선수의 심리를 이해하며, 왜 벤치에 앉아야 하는지 왜 궂은일을 해야 하는지 논리로 설득할 줄 아는 전문가가 지휘봉을 잡아야 한다. 군림하는 카리스마가 아니라 납득시키는 전문성이 새로운 지도력의 본질이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 시대의 한국에서 엘리트 체육은 분명 특별한 역할을 했다. 가난한 나라가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였고,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메달은 국민에게 가난을 딛고 일어설 자신감과 자부심을 안겨줬다. ‘국위 선양’이라는 말이 실제 힘을 갖던 시대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수많은 국제대회를 거치며 스포츠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각인하는 데 기여한 역사까지 부정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때의 나라가 아니다. 경제와 산업, 문화와 과학기술,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과 K-콘텐츠가 지구촌 곳곳에서 한국의 품격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 선진 강국이 이제 와서 금메달 몇 개를 더 따야 국가의 위신이 선다고 매달린다면 시대를 거꾸로 읽는 것이다. 국위 선양을 위해 선수를 징발하던 시대에서, 선수의 꿈과 도전을 국가가 든든하게 지켜주는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
스포츠를 둘러싼 언어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죽기 살기로 싸우겠습니다”, “그라운드에서 쓰러져 죽겠다는 각오로 뛰겠습니다.” 한때 우리는 이런 비장미를 투혼이라 칭송했고, 그런 선수를 비장한 영웅으로 소비했다. 그러나 스포츠는 결코 전쟁이 아니다. 선수는 국가를 대신해 사선으로 내몰린 병사가 아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과 자신을 파괴하는 것은 다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죽음을 각오하는 비장함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앞으로 우리가 선수에게 듣고 싶은 말은 “죽겠습니다”가 아니라, “내가 준비한 모든 것을 후회 없이 보여주겠습니다”여야 한다. 국민 역시 선수가 고통에 쓰러지는 장면에만 감동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당당하게 질주하고, 깨끗하게 패배를 받아들이며, 다시 일어나 도전하고 동료와 함께 성장하는 그 건강한 여정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면 된다. 스포츠의 언어는 전쟁의 잔혹함에서 인간의 도전과 성장을 축하하는 언어로 진화해야 한다.
메달 개수로 한 나라의 국력을 재던 시대 역시 저물었다. 한때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순위표는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국력의 잣대로 소비됐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의 역량을 보여주는 지표는 산업과 문화, 교육과 시민사회의 성숙도에 이르기까지 비교할 수 없이 넓어졌다. 메달은 선수와 팀이 흘린 땀의 빛나는 결실일 뿐, 국가의 서열표가 아니다.
2026년 아이치·나고야에서 한국은 금메달 39개를 수확했다. 누군가는 참패라고 탄식하고 누군가는 한국 체육의 위기를 외친다.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39라는 숫자 자체가 한국 스포츠의 미래를 가로막지는 않는다. 진짜 경계해야 할 것은 이 성적표를 받아 들고도 여전히 “요즘 선수들은 정신력이 글러 먹었다”며 과거의 군대식 합숙과 강압의 추억을 더듬거리는 체육계의 퇴행적 나태함이다.
그렇다고 “엘리트 체육은 이제 버려야 할 유물”이라며 냉소를 던지는 것도 무책임한 도피다. 인간은 여전히 더 빨리 달리고 싶고, 더 높이 뛰어올라 제 한계를 시험하고 싶어 한다. 그 뜨거운 원초적 열망이 존재하는 한 엘리트 스포츠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버려야 할 것은 엘리트 스포츠 그 자체가 아니라, 소수의 어린 선수를 합숙소에 가두고 국가를 위해 피땀을 바치라며 쥐어짜던 옛날식 메달 제조법이다. 선수의 삶과 존엄을 온전히 지켜주면서도 훈련은 과학으로 더 정밀하게 다듬고, 은퇴 후의 공포를 걷어내어 오직 승부에만 몰입하게 만드는 사회. 자유롭고 건강한 개인이 스스로 선택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그 강한 개인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하나로 뭉치는 스포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새로 달아야 할 심장이다.
수십 년 굴러온 낡은 엔진은 이제 멈춰 세워도 된다. 선수가 청춘을 바쳐 운동을 선택해도 자신의 인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나라. 메달의 색깔보다 선수의 땀방울과 성숙한 태도에 국민이 먼저 감동하는 나라. 국가가 선수를 앞세워 위신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선수가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도록 국가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나라.
그런 토양을 다져내는 순간 한국 스포츠는 다시 힘차게 달릴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따내야 할 가장 값진 메달은 도요타 스타디움이나 나고야의 시상대가 아니라, 바로 이 시스템을 근본부터 혁신하는 결승선 위에 놓여 있다.
◆ 시리즈 처음부터 | ① 축구는 4연패, 양궁 신화는 붕괴…우리가 가르친 아시아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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