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톨리니 미술관 소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황제 기마상, 사진: 위키피디아

(미디어원=박철민 칼럼니스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는 자신의 이성을 성찰한 [명상록暝想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명상록의 첫 장에 쓰여 있는 그의 고백을 각색하면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나의 배움은 이렇다. 처음에는 할아버지로부터 품행을 배웠고, 아버지로부터는 겸손과 기상을 배웠고, 어머니로부터는 절제의 힘과 삶의 너그러움이라는 생활 철학을 배웠다. 그 배움을 바탕으로 나는 내 지혜를 일깨우는 스승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웠다.

무술 스승에게서는 결투의 방법과 내면의 안정을 배웠고, 인문학자인 스승 디오네투스에게서는 삶의 진정한 철학을 배웠다. 교육철학가인 스승 루스티쿠스에게는 인격과 독서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담대한 스승 아폴로니우스에게서는 의지와 자유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었고, 세상을 초월한 철인 섹스투스로부터는 권위와 세상을 사는 순리 그리고 존경심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과학자인 스승 알렉산드르에게서는 탐구의 진취적인 방법을 얻을 수 있었다.

더불어 나는 법학자인 스승 세베루스에게서는 법률과 평등주의 그리고 군주정치체제를 이수 받았고, 내 인생의 진정한 멘토인 막시무스로부터는 군주로서의 가장 중요 덕목인 [도덕적 성품]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스스로가 독백하였듯이 체계적인 배움의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양되고 발아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성의 밀도와 학문의 체계가 얼마나 공고했겠습니까? 또한 그러한 교육적 밀도를 바탕으로 다스리던 그의 나라가 어찌 튼튼하고 교양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그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완성된 스토아적인 사상을 체계화하여 그의 제국을 다스렸고, 자신의 심신을 배양함과 동시에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배운 철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심화되고 배양되어 그의 삶의 동인으로 작용하며 [명상록]을 낳는 원천으로 자리합니다. 살아가면서 적절한 교육체계와 더불어 질서정연한 피교육자의 정서적인 자세는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교육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려는 자의 철저한 교감이 작용해야만 영양가 높은 의미를 배양합니다.

허나 지금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요? 이 나라의 그릇된 교육적 풍토가 낳은 아류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또 어떤가요? 교육의 수장(守將)부터 비교육적이고 결코 우아하지 못한 자태를 지닌 이 나라에서 무언가 도덕적 선의 일발을 발견한다는 것은, 아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교육의 발뒤꿈치에서라도 서성댈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생활은 존재의 완성이었고, 죽음은 삶의 종말이지만 극복할 수 있는 변화였습니다. 비단 아우렐리우스처럼 철저한 교육을 통한 가치의 창의적 변용은 아니지만, 살아가면서 느끼는 변화는 우리가 터득했거나 저절로 육화된 이성으로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이 지금도 우리 주위에 머무는 스토아 철학의 본질을 창조했듯이, 우리의 일반적인 삶의 자세에도 얼마든지 이성의 구현은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물질과 명성을 추구하며 살고 그것은 당연한 인간의 권리입니다. 또한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건실한 자세에서 사회의 성장 동력은 더욱 힘찬 엔진을 가동하지요. 그러나 그릇된 사고관과 인간으로 태어나 느끼고 성찰해야할 과제를 망각하고 얻는 물질과 명성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상태의 명성이란 한낱 모래알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대의 명성이 아무리 거대하다해도, 우주라는 상상의 정의를 벗어나는 공간을 생각해보면 아주 작은 미세한 입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모래알(微塵)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내 존재와의 끝없는 전쟁이므로 공부는 계속되어야 하고, 이승의 삶이란 그저 낯 선 땅에서 잠시 머무는 것일 뿐이므로 우리는 생의 본질을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풍토에서 잠시 보관한 것을 돌려주고 간다는 주윤발의 철학이나, 자수성가한 구미의 억만 장자 부자들의 선행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기대치를 충족하는 물질과 명성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오체불만족五體不滿足]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가 명성과 물질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파멸한 오토다케 히로타다 같은 어리석음(愚)은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성숙한 가을은 울긋불긋 아름다운 단풍의 자태로 결실의 계절을 안겨주지만, 결국 매서운 추위가 잠복한 겨울의 전령 앞에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줍니다. 배운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이 오로지 나의 존재확인에만 머물 때, 겨울은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것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성찰하고 터득한 이성의 제국 앞에는 가족의 배려와 좋은 스승들의 가르침,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지적성찰이 있었습니다. 가을이 더 깊어가기 전에 경제의 ‘도그마’로부터도 자유를 얻고 존재의 이유에 대한 더 깊은 내면의 성찰을 가지런히 세워야 활 것 같습니다.

글:박철민 칼럼니스트 작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