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지역과 지역을 나누는 기준은 거대한 산하였다 . 산에 막히고 , 강이 가로놓이면 여기까지가 어디어디 지역이고 , 저 산 너머는 다른 지역인 것이었다 .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강과 산을 통해 구획이 정비되고 명칭이 나눠진다 . 그 기준은 바로 백두대간이다 .
백두산에서 시작해 지리산까지 이르는 백두대간은 장장 1800 ㎞ 에 이르고 , 우리 땅을 동과 서로 나누면서 많은 골과 들과 터를 이루었다 . 일제는 우리의 등뼈를 무기력하게 만들기 위해 백두대간의 정수리에 못을 박고 , 그 이야기를 왜곡해 퍼뜨렸다 .
오랜 세월 잊혔던 백두대간이 우리민족의 정기를 품고 여전히 우뚝 서있다는 사실은 다시 보아도 희열이며 감동이다 . 이를 거닌다는 것이 비록 힘에 붙이더라도 장엄한 백두대간을 발밑에 둔 다는 것은 어느 TV 프로그램 제목처럼 남자의 자격인지도 모른다 . 이제 우리민족의 등뼈 , 백두대간을 거닐어 보자 .
진부령 , 한껏 등을 움츠린 백두대간의 시작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과 통한다는 개념은 조선시대 이래 우리 민족의 자연 인식 체계를 이루는 중요한 틀이었다 . 이중환의 ‘ 택리지 ’ 와 김정호의 ‘ 대동여지도 ’, 이익의 ‘ 성호사설 ’ 이 모두 여기에 기초하여 지도를 그리고 지리서를 썼다 .
그렇다고 백두대간을 거닐기 위한 거창한 포부를 시작한다고 백두산으로 부터의 종단을 꿈꾸지는 말자 . 걸을 수 없는 저 백두산부터 포태산 , 차일봉 , 두류산 , 금강산 등 북에 위치한 봉우리들은 꿈속의 비경으로 남겨두는 것이 낫다 . 백두대간에게 마저 인간의 쓸데없는 정복욕 따위를 앞세우는 것은 무모하며 어리석다 . ‘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 강은 산을 뚫지 못한다 ’ 는 고언을 고작 인간 너부렁이가 넘어서겠다는 우를 범할 수는 없다 .
남한에서 종주할 수 있는 백두대간의 거리는 진부령에서 지리산까지 약 670 ㎞ 에 이른다 . 설악산 (1708m), 오대산 (1563m), 태백산 (1567m), 덕유산 (1614m), 지리산 (1915m) 가 1500m 이상의 고산 ( 高山 ) 이다 . 어찌 보면 트래킹이라는 낱말은 백두대간 걷는 것을 가벼이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 하지만 한반도 그 어디를 트래킹하든 처음 시작은 무조건 백두대간이다 . 어찌 다른 곳을 먼저 살펴볼 수 있겠는가 .
그리하여 한반도 거닐기의 첫 번째 행보는 백두대간의 시작점 , 진부령이다 .
백두대간의 처음과 끝 ( 진부령 ~ 미시령 16.44km)
진부령 (520m) 은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간성읍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최북단의 고개 . 황태 덕장이 즐비한 인제 북면 용대리의 용대교차로에서 좌회전해 46 번 국도를 타고 5.7 ㎞ 를 달리면 고개 같지 않은 야트막한 고개가 나온다 . 하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꽤 높은 고개다 .
고개 길이가 60 ㎞ 인 진부령은 백두대간의 시작점이자 종착점 . 곰 조각 하나가 서 있는 오솔길을 오르면 백두대간 종주를 기념하는 리본이 나뭇가지에 빽빽하게 걸려 있다 . 지리산에서부터 백두대간 종단을 시도한 사람들이 마침내 남한 종착점인 진부령에 도착했다는 표식이다 .
우리는 이들과 반대로 진부령에서 시작해 지리산으로 향한다 . 그 이유는 지리산에서부터 시작된 종단코스는 진부령에서 끝나며 아쉬운 뒷맛을 남기기 때문이다 . 아득한 향로봉을 지척에 두고 백두대간 종단이라는 희열을 느끼기엔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남는다 .
진부령에 오르는 길은 다른 고개와 달리 높지도 않고 , 험하지도 않은 탓에 이런 저런 조그만 가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다 . 거창한 백두대간의 고갯마루가 아니라 여느 작은 도시의 읍내에 들어선 것 같다 .
수월하게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진부령 고개 주변을 낱낱이 살펴볼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진다 . 한계령이나 미시령만큼의 거대하고 웅장한 산세는 볼 수 없어 혹자는 진부령을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 하지만 그렇기에 온가족과 함께 발맞추어 길손행세를 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 어린아이부터 나이든 노부까지 힘들이지 않고 백두대간 한 부분의 감촉을 발끝으로 느낄 수 있다 .
오랜 세월 교통로로 활용되어 선인들의 짚신에 닳고 달아 낮아진 진부령은 그러나 맑은 날엔 고개에서 저 멀리 푸른 동해바다와 초록의 수풀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절경을 제공한다 . 대간 길을 따르다보면 마산봉이 펼쳐진다 . 사실 남한에서 백두대간 시령은 향로봉이지만 민간인 통제구역이라 이 마산봉이 우리가 이를 수 있는 백두대간의 시령이나 다름없다 .
매년 이맘때면 백두대간 표지석 주변으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 고성군은 낙엽송을 이용한 관망대까지 설치해 등산객은 물론 일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
진부령 고갯마루에 위치한 진부령미술관은 작품 ‘ 소 ‘ 로 유명한 이중섭 화백의 상설전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 진부령에서 보는 향로봉 (1287m) 의 모습이 웅장하다 .
진부령에서 마산봉까지 2 시간여 계속된 오르막에 지친 몸을 마산봉에서 쉬고 편한 길을 30 분 정도 걸으면 병풍바위에 도착한다 . 병풍바위 하산 길에 되돌아본 너덜지대는 운해에 쌓여 장관을 이루고 어느새 대간령에 다다른다 . 진부령과 미시령이 개통되면서 이제는 옛길이 되어버린 641m 의 고갯길 , 백두대간의 이름을 온전히 간직한 고개라서 그런지 더 정이 가는 길이다 .
신선봉을 우회하는 길도 있지만 신선봉을 두고 길을 떠난다는 것은 백미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기암괴석이 둘러싸고 두 발아래로는 동해를 밟는 이 기분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
운해에 가려진 울산바위를 비롯한 설악의 정취를 만끽할 수는 없었지만 각양의 괴석들과 벗한 시간은 오래도록 마음 한편에 자리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