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몽골인, 그 찬란한 영광의 자취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지만 드넓은 초원 푸르른 하늘 그리고 70년대의 우리를 연상시키는 정감 가득한 몽골인의 모습에서 800년 전의 대제국을 호령하던 그들 선조의 위세가 어렴풋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후어호트 성도에서 시작한 내몽고 여행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역사와 문화 여행으로 짧은 여정동안 어린 시절 옆집 누이의 수줍은 미소를 만나고 척박했던 우리네 60년 70년대 삶을 다시 돌아보며 수 백 년 전 천하를 호령하던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을 느껴 볼 수 있었다.
밤늦게 도착한 자치구 정부 소재지 후허호트는 어느 대도시 못지않은 높은 빌딩과 도시를 온통 감싸고 있는 휘황찬란한 네온 불빛으로 경제발전의 중심에 있음을 먼저 알려 주었다.복잡한 항공일정으로 하루 꼬박 걸린 여독을 풀기 위해 서둘러 잠자리를 찾는다.
이른 아침 도시의 모습은 잠시 보았던 야경에서의 짐작그대로 거리를 가득 메운 차량과 사람들 그리고 도시 곳곳의 건설공사로 분주하고 활기 가득다.
138Km 거리의 우란차부시로 향하는 차안에서 초원의 지배자인 그들의 선조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다시금 도약을 준비하는 세계적 자원보고 내몽고의 밝은 미래를 상상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우란차부시의 거간타라 초원관광센터에서는 7월 8월 10일정도 열리는 몽고의 전통의 "나다모(那達幕)"축제가 열렸다. 나다모 축제는 몽골말로 ‘유희’ 오락의 뜻으로, 길고 추운 겨울을 지나 날씨가 쾌청해지고 가축이 살찌며 모든 것이 풍요로워 지는 7, 8월에 몽고족뿐만 아니라 부근의 다른 여러 민족이 전통 복장으로 함께 모여 경마 활쏘기 달리기 축구 등 함께 하며 즐기고 나누는 전통의 축제이다.
나다모 축제에 대한 기록은 칭기즈칸 시대에 나타나는데, 1회 나다모는 1225년에 기록된 칭기즈 칸의 석문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화자자모를 굴복시킨 칭기즈 칸이 승전을 축하하기 위하여 나다모 축제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고 기록은 전하며 계속 전승된 나다모 축제는 경축행사 때 주로 거행되었고 많은 군중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로 ‘파탁이’ 즉 영웅선발대회의 성격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한다.
나다모는 3가지의 기예 겨루기가 그 바탕이 된다. 씨름 활쏘기 말경주가 행사의 중심이었으며 현재 실시하고 있는 행사의 중심은 씨름과 말 경주 즉 ‘새마’라 할 수 있다.
힘과 기술을 겸비해야 하는 몽고 씨름 ‘부흐"는 우리씨름의 샅바대신 상대방이 잡을 수 있도록 한 ‘조덕’이라는 조끼를 입으며 좋은 운을 상징하며 출전선수의 소원을 담아 그린 길상무늬 반바지 ‘쇼닥’과 화려한 색상의 가죽 장화 ‘구탈’로 화려함과 볼거리를 더한다.
새마는 관중의 호응을 가장 많이 받는 시합으로 참가자는 수십 수백 명에 이른다. 또한 참가 자격에 연령 제한이 없음으로 어린 소년과 소녀들도 참가를 하는데 아버지의 손에 말고삐를 맡기고 당당히 빼앗아 버리고 만다.
5 6세의 어린 기수들이 이미 4세부터 혼자 말 타는 연습을 하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나서는 더욱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라마교 사원이나 오보(서낭당)에서 혹은 집에서 기도를 올리고 새마 출발지인 아이친다와라에 도착하여 새마에 참여하게 된다.
3만여 명이 참여한 거간타라초원관광센터의 축제는 몽고에서 가장 무더운 시기라는 7월의 태양 볕만큼 뜨거운 열기로 가득하였고 잘 보존된 전통과 몽고인의 가슴에 내재되어 있는 자긍심을 엿볼 수 있는 좋은 행사였다. 현재 진행 중인 대규모 행사장과 관람석 건설 공사가 완료되는 올해 말 이후로는 현대적인 시설에서 보다 편안하게 몽고 전통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라 한다.
하루 내 진행되는 축제의 중간에 참가자들은 지근거리의 대 식당으로 이동하여 전래의 축제 음식인 양고기와 백주를 즐겨 볼 수 있다. 점심 내내 주변은 서로에게 전하는 덕담과 건배 제의로 가득하고 진심으로 정성 가득 손님을 대접하는 이들의 마음이 함께 전해져 온다.
한반도의 5배 이상 크기인 내몽고자치구의 여행에서 이동 시간을 적절히 잘 활용하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일이다. 도로망이 아직 완벽히 정리되지 않았고 현재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나라이기에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길어 피로도가 가중된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고 이동 중간에 재충전할 수 있는 휴게실도 찾아보기 힘들어 음료나 읽을거리 볼거리 혹은 MP3 등을 준비하는 것은 여행의 지혜가 될 것이다.
포장과 비포장 길을 5시간여를 달리는 동안 이 광대한 땅을 달리며 세계 정벌을 꿈꾸던 몽고인의 기상을 그려 보기도 하고 연간 강수량인 50~450mm의 대부분이 집중되는 우기임에도 불구하고 물줄기가 쓸고 나간 자취만 남아 있는 건천과 나무 한포기 없는 민둥산을 보며 누구의 잘못으로 이렇듯 자연이 파괴되었는가 하는 의문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교차하는 사이, 내몽고 최대 라마교 사원인 우당자오에 도착하였다.
흙먼지 풀썩이던 길, 나무 한그루 보기 힘들던 민둥산을 지나 깊이깊이 들어온 바우터우시 북쪽 인산(陰山)의 골짜기 우당꺼우에 청대 강희제 시절인 1749년에 중건되었으며 티베트의 자스룬부사를 모방하여 산세를 따라 건조한 6전 3부 1당과 94동의 라마숙소로 이루어진 방대한 크기의 우당자오가 위치한다.
내몽고자치구내에서는 가장 크고 중국 32대 라마 사원 중의 하나인 우당자오에는 각종소재로 주조된 불상 1,500기와 많은 보물 그리고 다양한 불화 들이 소장되어 있어 소수 민족의 역사와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우당자오(五當召)는 본시 티베트 어로 하얀 연꽃을 의미하며 몽골어로는 버드나무를 칭한다. 티베트불교라고도 칭하는 라마교는 만주 몽고 네팔에서 발달한 대승불교의 종파이며 스승(라마)을 중시하기에 라마교라고 불린다. 타인의 종교이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더 행복한 세상과 더 행복한 몽고인의 삶을 기원하며 "옴마니 반메홈"을 읊조리며 세속으로 내려온다.
칭기즈칸(成吉思汗), 몽골제국의 창시자 묘호 태조, 아명 테무친(鐵木眞), 대칸을 만나러 간다. 복잡한 마음이다. 유례없는 대정복의 영웅으로 알렉산더, 시저, 나폴레옹, 히틀러가 수백만의 대군으로 수십 년에 걸쳐 건설한 제국의 영토를 합친 것보다 넓은 유라시아 대부분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불과 20년의 기간 그리고 고작 10만의 몽고군으로 건설한 대영웅.
세계적 시사주간지 타임은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했다. 정복군주 알렉산더 나폴레옹이 아니었으며 예수도 석가모니도 아니었다. 잔혹한 약탈자 침략자로 폄하하였던 사가(史家)들도 좁은 지역에서 서로 차단되었던 유럽과 아시아가 더 큰 세계로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든 대 영웅을 재조명하고 있다.
큰 인물의 삶, 역사책 속에서 궁금하였던 칭기즈칸 능을 향하면서 마음 다른 한 구석에서는 정복의 피해자의 자손으로써의 분노가 슬며시 꿈틀거린다. 역사 시간, 몽고의 침입과 눈물겨운 민족의 항쟁 그리고 잔혹한 수탈의 시대는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얼둬스시 이진훠러기의 칭기즈칸 능은 55000평방미터에 거대하게 조성되어있다.
1227년 여름 칭기즈칸이 몽고대군을 거느리고 서하 정벌을 하던 중 서하와 금나라를 멸망시키라는 유언을 남기고 8월25일 청수행궁에서 병사한 후 몽고 본토로 후송되고 기련곡이란 곳에 안장되었다 한다.
현재까지도 칭기즈칸의 후손들도 많이 안치되었다는 기련곡이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중국 , 일본, 미국, 한국 등 의 나라에서 대칸의 무덤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본시 무덤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던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흰 천막 8개(八白室)를 그의 상징적인 무덤으로 하여 대대로 그것을 지키면서 성대하게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본시 팔 백실은 알타이산 북쪽 하다이산 남쪽의 어터커에 있다가 명대에 팔 백실을 지키던 몽고족 어얼둬스 부족이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어얼둬스 고원으로 이주하면서 팔 백실도 어얼둬스의 이커자오맹으로 옮겨왔다가 이진훠러기(몽고어로 황제의 능이라는 뜻)의 간더리 초원으로 옮긴지 3백년이 지났다 한다.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수립후 중국정부는 팔 백실을 유적지로 크게 재 조성하였다. 면적 55000평방미터의 주요 건축물은 3채의 몽고식 대전으로 정전의 높이는 26m 팔각형의 몽고파오식 지붕이며, 위에는 황색의 유리기와가 덥혀있다. 동서 양 쪽의 전에는 부등변의 팔각형 단층처마에 몽고파오식 지붕이 있고 이 역시 황색의 유리기와가 덮여 있어 몽고의 전통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정전의 중앙에는 칭기즈칸의 동상이 있고 동상 뒤에는 사대한국(四大汗國)의 국경을 그린 그림이 있다. 칭기즈칸의 관은 부인의 관과 함께 침궁의 중앙 링바오(靈包)안에 모셔져 있다.
칭기즈칸 능의 입구에서 만나는 6.6미터의 대칸의 기마상 모습에서 대제국 건설의 영웅의 모습과 침탈의 약탈자의 모습을 함께 느끼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절감한다.
몽고의 여행은 세계의 유명관광지들에서 느끼지 못한 특별한 무엇인가를 여행자에게 선사한다.
사라져 가는 옛것들, 전래되었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불편이란 이유로 던져 버린 현대인들에게 그것들이 그저 버려져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닫게 해 준다.
여행을 하면서 겪는 조그만 불편함은 일정 내내 같이 하였지만 꼭 다시 찾아보고 싶은 곳, 좀 더 깊이 있는 여행을 하고 싶은 곳, 이번 내몽고 여행으로 몽고는 더욱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