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을 찾은 게 벌써 여러 차례지만 ‘ 예던길 ‘ 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다 . 안동에 사는 지인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 글쎄요 .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 " 정도가 전부다 . 퇴계 이황이 여러 차례 거닐었고 , 그 영향으로 후대의 문인 , 묵객들도 자주 찾던 길이라는 이야기를 접하고 그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 퇴계종택 , 퇴계묘소 , 도산서원 등 퇴계의 흔적이 가득한 안동시 도산면으로 찾아갔다 . 널리 알려지지 않아 고즈넉하게 거닐 수 있는 예던길에 첫발을 내딛어본다 .
퇴계 이황의 발자취를 따라 거니는 길
안동시 도산면 단천교 ( 백운지교 ) 에서 예던길 걷기를 시작한다 . 단천교 동쪽과 서쪽으로 예던길이 나 있다 . 단천교 서쪽 길을 택해서 조금 걸으니 ‘ 녀던길 ‘ 이라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 ‘ 녀던 ‘ 은 ‘ 가던 ‘, ‘ 다니던 ‘ 의 뜻이 담겨 있으며 , 퇴계가 지은 < 도산십이곡 > 에도 녀던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
고인 ( 古人 ) 도 날 몯 보고 나도 고인 몯 뵈
고인을 몯 뵈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 옛 성현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그분들을 못 뵙네
옛 성현을 못 봬도 그분들이 행하던 길은 앞에 있네
그분들이 가던 길이 앞에 있는데 아니 가고 어쩌리 )
녀던길이라는 이름 대신 이제는 예던길로 불리는 이 길은 퇴계가 숙부 ( 송재 이우 ) 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위해 청량산으로 가면서 처음 걸었던 곳이다 . 스스로 ‘ 청량산인 ‘ 이라고 부를 정도로 청량산을 사랑했던 퇴계는 그후로도 여러 차례 이 길을 걸어 청량산으로 향했다 . 그런 까닭에 ‘ 퇴계오솔길 ‘ 이라 불리기도 한다 . 즉 녀던길 , 예던길 , 퇴계오솔길이 모두 같은 길이다 .
도산면에 접어들어 도산서원 , 퇴계종택 , 이육사문학관을 지나 단천교에서 본격적인 예던길 걷기를 시작해보자 . 단천교 서쪽으로는 전망대에서 건지산을 넘어 농암종택을 지나 고산정까지 이어지는 길이 있고 , 동쪽으로는 백운지 전망대에서 가송리까지 가는 길이 있다 .
퇴계는 낙동강변을 따라 거닐었으나 현재는 사유지 문제로 인해 옛길을 그대로 걸을 수는 없다 . 단천교에서 고산정까지 가는 길에 백운동 , 미천장담 , 한속담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퇴계의 한시와 그 경관을 감상할 수 있어 ‘ 시심의 길 ‘ 이라 불리기도 한다 .
한참 동안 기억하여 보네 , 어릴 때에 여기서 낚시하던 일을 .
삼십 년 긴 세월 동안에 속세에서 자연을 등지고 살았네 .
내 돌아와 보니 알아볼 수 있네 , 옛 시내와 산 모습을 .
시내와 산은 반드시 그렇지는 못하리라 , 나의 늙은 얼굴을 알아보지는 .
< 미천장담 >
전망대에 서서 낙동강과 청량산이 어우러진 절경을 바라보고 바위에 새겨진 퇴계의 한시를 읊어본다 . 퇴계가 노래한 < 미천장담 > 과 < 경암 > 싯귀가 적혀 있다 . 전망대에서 감흥에 젖어 퇴계가 거닐었던 길 그대로 따라 가보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친다 . 하지만 아쉽게도 퇴계가 걸었다는 강변길은 막혀 있다 . 안동시에서는 강변길 대신 건지산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들어놓았다 . 약 4km 에 달하는 산길이다 . 산행이 부담스럽다고 예던길 걷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
낙동강을 따라 퇴계가 거닐었던 예던길
산행에 자신이 없다면 다시 차를 타고 농암종택이 있는 가송리로 가서 예던길을 이어 걸어보자 . 이곳에서는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벽력암 , 한속담 , 월명담 등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 수려한 풍광의 벽력암을 마주하고 고즈넉하게 자리한 농암종택은 < 어부가 > 로 유명한 농암 이현보가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 1370 년에 지어졌다 . 농암종택은 원래 도산서원 인근 분천동에 있었으나 1975 년 안동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됨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이전 복원했다 . 종택과 사당 , 긍구당 , 분강서원 , 애일당 등 농암 관련 각종 문화재를 지금의 자리로 한데 모아놓았다 .
농암종택은 그 자체로만으로도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 예던길에서 퇴계와 연계해 만나봐도 재미있다 . 농암은 퇴계의 숙부와 함께 과거에 급제했으며 둘은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퇴계 역시 농암과 교류했으며 , 그의 둘째 아들 이문량과도 친구 사이였다 . 퇴계의 < 도산십이곡 > 은 < 어부가 > 의 영향을 받았다 . 이렇듯 농암종택에서도 퇴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
농암종택 대문 앞에 서면 긍구당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 고려시대 농암의 고조부 이헌이 지어 손님을 맞는 별당으로 사용하다가 농암이 중수하여 ‘ 조상의 유업을 길이 잇는다 ‘ 는 뜻을 담아 긍구당 ( 肯構堂 ) 이라 칭했다 .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앞면에 넓은 마루가 있어 시원한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
종택 옆으로는 분강서원이 자리한다 . 이곳은 광해군 때 (1613) 농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뜻으로 향현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가 숙종 때 (1700) 서원으로 개편되었다 . 분강서원을 지나 산기슭에는 농암이 연로한 부친 , 숙부 , 외숙부를 위해 지었던 애일당 ( 愛日堂 ) 이 자리한다 . 농암종택의 사랑채 , 긍구당 , 대문채 , 별채 등과 분강서원 , 애일당 모두 숙박 체험이 가능하므로 하룻밤 묵으며 선인들과 조우하는 사색의 시간을 가져도 좋다 .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고산정
농암종택에서 청량산 방향으로 강변길을 따라 걷다가 오래된 다리 하나를 건너면 고산정 ( 孤山亭 ) 이 수줍은 듯 의연한 자태를 드러낸다 . 퇴계의 제자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 금난수의 정자로 주변 경치가 빼어나다 . 금난수는 퇴계가 거닌 예던길을 걷다가 이곳의 정취에 도취돼 고산정을 지었다 . 퇴계를 비롯한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들러 수려한 풍광을 칭송했다 .
고산정까지 걷다 보니 퇴계가 친구 이문량에게 건넨 편지에 적혀 있던 싯귀가 점점 뚜렷하게 마음속에 번져나간다 . 수백 년 전의 글귀가 긴 세월을 건너뛰어 한순간에 예던길을 걷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
산봉우리 봉긋봉긋 , 물소리 졸졸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