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1952)를 「바다와 노인」으로 읽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처음 볼 때부터 그랬다. 아마 중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그 관성이 꽤나 오래갔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헷갈렸다. 선생이 되고, ‘모르는 것은 용서가 되지만 틀리면 안 된다’라는 강박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나서부터 그 용심(用心)이 사라졌다. 부득불 제대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노인과 바다」가 문자 그대로 ‘제대로’ 읽힌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뒤의 일이다. 어느날 문득, 내 삶이 그저 대양(大洋)에 떠 있는 한조각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친 풍랑이 손바닥 뒤집듯, 아무런 원인도 출처도 없이, 내 삶을 유린하였고 나는 끝없이 표류했다. 바다가 그래서 바다구나, 노인도 그래서 노인이고, 밑도 끝도 없이 그런 염이 들었다. 사방은 어두웠고 사개는 맞지 않았고 바닥은 끝 모르게 깊었다. 한참을 방향감각 없이 가라앉다가, 문득 구명조끼를 찾을 궁리를 했다. 손에 「노인과 바다」가 잡혔다. 물론, ‘노인(老人)’이라는 단어를 두고 암약하던 그 정체모를 심술도 이미 일말의 저항도 없이 순순히 투항한 뒤였다. 돌아보니, 순명(順命)만이 남아있었다….
……다음번 회전에서 그는 거의 고기를 손아귀에 넣을 뻔했다. 그러나 또 고기는 바로 서더니 유유히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네 놈이 나를 죽이는구나, 고기야,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그럴 권리가 있다. 나는 지금껏 너보다 위대하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고귀한 놈을 본 일이 없다. 형제여, 자, 와서 나를 죽여라. 누가 누구를 죽이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자, 이젠 또 머리가 희미해지나 보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맑게 식혀야만 한다. 머리를 맑게 식히고 어떻게 하면 사나이답게 고통을 견디어 내느냐를 알아야 한다. 아니면 고기처럼이라도, 하고 그는 생각했다.
「정신 차려라, 머리야.」
그는 자기 귀에도 거의 안 들릴 만한 소리로 중얼댔다.
「정신 차려.」
고기는 두 번이나 더 회전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모르겠다,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때마다 기절할 것만 같았다.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 더 해보자.<중략>
그는 그의 모든 고통과 남은 힘 전부와 먼 옛날에 가졌던 긍지를 통틀어 고기에게 고통을 주도록 내던졌다. 고기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유유히 그 곁을 헤엄쳐 가며 주둥이가 뱃전에 닿을 정도로 다가왔다가 스쳐가기 시작했다. 몸집은 길고 넓고 자색으로 아롱진 은빛으로 빛나고 그 크기가 끝없이 크게 보이는 덩어리가 배를 지나쳐 가려고 했다.
노인은 줄을 밑에 놓고 그것을 발로 딛고 서서 작살을 들 수 있는 데까지 높이 쳐들어 있는 힘을 다하여, 아니 새로이 쥐어 짜 낸 마지막 힘을 다하여 고기의 옆구리를 향해 사람의 가슴 높이만큼 높이 솟아 있는 그 거대한 가슴지느러미 바로 뒤를 겨누어 고기 옆구리를 내리찔렀다. 쇠가 고기의 살 속을 뚫고 들어가는 감촉을 느꼈으며, 그는 작살에 몸의 중량을 의지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더욱 더 내리밀었다.
그러자 고기는 몸에 치명상을 입고도 갑자기 활발해져서 물 위로 높이 뛰어 오르면서 그 거대한 길이와 넓이를 남김없이 드러내고 그 힘과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과시했다. 고기는 배 안에 있는 노인보다도 높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물속으로 텀벙하고 떨어지며 노인과 배를 온통 물보라 속에 덮어씌우고 말았다.<중략>
노인은 흘깃 눈에 보인 듯한 환상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물 말뚝에다 작살 밧줄을 두 번 감아 매고는 두 손 위에 머리를 놓았다.
「내 머리를 식혀 달라.」
그는 이물 판자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나는 지친 늙은이다. 그러나 나는 내 형제인 고기를 죽였고, 이제부터는 고된 잡일을 해야 한다.」[헤밍웨이(양병탁 역), 『노인과 바다』 중에서]
헤밍웨이가 주는 감동은 무엇보다도, 그가 묘사하는 ‘행동의 깊이’에서 나온다. 그 부분은 단연 압도적이다. 묘사의 힘이 모든 관념을 압도한다. 웬만큼 어부 생활을 해보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경지를 그는 묘사한다. 헤밍웨이는 수렵, 낚시, 복싱 등 자신의 관심과 취향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몰두했다. 그는 그러한 ‘행동의 깊이’를 통해 자신에게 허여된 삶의 깊이를 탐사, 발굴한다. 종내는 그것을 정련(精練)해낸다. 그리고 자신만의 언어로 그것을 우리에게 전이(轉移)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황금의 말(言)’이 된다. 언어와 행위가 높은 데서 한데 어우러진다. 그것을 통해 그가 취한 것은 ‘인간의 승리’다. 생의 목표는 오직 그것뿐이다. 승리하는 자는 위대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승리를 위해 사는 자들은 인간이든, 고기든 모두 ‘형제’가 된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걸고 승리의 길에 매진한다. 헤밍웨이는 그렇게 말로 된 그림을 그려낸다.
말과 행동의 상호텍스트성으로서의 ‘황금의 말’,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서의 ‘승리하는 인간’은 윌리엄 포크너에게서도 양보할수 없는 화두였다. “기계는 오래 견디고 동물은 생존한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승리할 수 있다”라고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그는 말한다. 오직 인간만이 승리할 수 있다….. 위대한 작가를 꿈구는 자라면 그 누구도 그 계시를 거역할 수 없다. 인간만이 지닌, 자비와 희생과 명예를 위하여 투쟁할 수 있는 영혼과 정신, 그리고 그것을 실어나르는 영원히 지칠 줄 모르는 작은 목소리, 그런 ‘황금의 말’이야말로 위대한 모든 작가들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글: 양선규/소설가 대구교육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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