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녹아 흐르는 소박한 아름다움, 창덕궁 후원길
이른 아침, 창덕궁의 기와 담장을 따라 걷노라니 저 멀리 한 노모의 모습이 보인다. 하얀 머리에 굽은 허리를 짚고 담장을 따라 조용히, 말없이 걸어오는 모습이 고궁과 참 많이 닮은 듯해 왠지 모를 울컥거림을 갖게 한다.
너무 이른 탓인지 굳게 닫힌 창덕궁의 돈화문은 세상과 결계를 치듯 위엄하고 장엄하게 세워져 있다. 저 문으로 들어서면 무엇이 기다릴까. 사뭇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으로 문이 열리기만을 손꼽았다.
글 이정찬(미디어원 발행인) 사진 이정찬, 한국관광공사DB
미로의 끝자락에서 찾은 보물들
두 차례에 걸친’왕자의 난’을 이유로 태종은 1406년 새로운 궁궐을 짓기 시작했고, 1412년 창덕궁의 돈화문을 지으면서 궁궐의 면모를 갖췄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인조반정(1623)과 실화로 수차례의 소실과 복원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약간의 변모도 있었을 것이다.
창덕궁의 백미는 ‘후원’이라고 말한다. 사실 어느 한 곳이 아름답고 귀하지 않겠냐마는 여러 제왕들의 후원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남달랐다. 그중 세조는 후원의 영역을 2배로 확장시켜 북악에서 내려오는 매봉의 맥을 후원에까지 두도록 했는데, 이는 아마도 제왕으로서 느껴야 했던 고단함과 두려움에 유일한 안식처로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창덕궁의 정원엔 별칭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궁궐의 뒤편에 있다고 해서 ‘후원’이라 부르기도 하고, 고종 40년(1903년) 궁궐 내부 관제를 개정하면서 후원을 관리하던 관청을 비원(秘苑)이라 하여 ‘비원’이란 명칭도 생겨났다. 이외에도 ‘금원(禁苑)’ ‘내원(內苑)’ ‘북원(北苑)’ 등으로 불린다.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던 돈화문이 열리고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찬 마음을 궁으로 들여 놓았다. 돈화문 안에서 바라본 창덕궁의 위엄은 상상보다 훨씬 크게 다가와 나를 숙연케 했다. 궁궐을 보위하던 금천교를 지나 인장전으로 들어섰고, 여기서 5분여를 더 걸어 창덕궁 후원 입구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만난 보물은 부용지와 주합루. 자연에 녹아든 주합루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빨려 들어갔다. 주합루는 장중하고도 위풍당당한 풍채를 자랑하고, 화(華)계단 아래 대나무 취병은 무희처럼 늘어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화계단 아래에서 바라본 어수문의 사모지붕은 장중한 주합루를 향해 경배하듯 내려앉아 있었다. 어수문 지붕 옆으로는 주합루 측면의 지붕선이 보인다. 어수문의 지붕크기를 거기에 맞춘 까닭이다. 주합루 현판엔 정조의 어필이 걸려있다. 그 옛날 1층 규장각에선 많은 실학자들과 인재들이 정조의 개혁정치를 도왔을 것이다. 주합(宙合)이란 육합(?合)을 의미한다. 동서남북과 하늘과 땅. 곧 천지 우주가 통하는 집이란 뜻이다.
같은 의미로 부용지를 네모로 만들고 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었다. 옛날 사람들은 하늘은 네모의 형상이고 땅은 둥글다고 여겼기에 이는 하늘과 땅을 의미한다. 부용지에 세워진 부용각은 선비가 탁족(濯足)을 하듯 두 기둥을 연못에 담갔고, 다른 두 기둥은 땅을 짚고 있다. 참으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형상에 감탄과 놀라움 그리고 경외심마저 든다.
임금이 연회를 갖고 시험을 보게 했다던 영화당의 기품을 바라보며 두 번째 보물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후원 깊숙이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눈길과 코끝을 이끄는 것들이 있으니, 다름 아닌 후원과 함께 수백년을 보낸 숲과 나무다.
우거진 듯 잘 정돈되어 있고, 정돈된 듯 자연 그대로인 나무들이 세월의 시간만큼이나 아름드리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가끔 바람에 흩날리듯 떨어지는 느티나무 잎의 흥에 취해 순간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고궁이란 생각조차 잊는다.
햇살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있는 노송의 자락이 곧 내게 쓰러질 듯 고개 숙이고, 아름드리나무 자락 자락이 서로를 향해 어깨동무하며 후원의 아름다움을 숨기려는 듯하다. 후원을 거니는 내게도 그 어깨 한 자락을 내어주며 후한 인심을 자랑한다. 지금 걷는 이 길을 그 옛날 제왕들도 걸었으리라 생각하니, 나무들 역시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두 번째 보석은 애련지와 의두합이다. 가을 단풍이 짙어질수록 아름다움을 더하고, 그 아름다움에 탄성이 끊이지 않는 곳이 바로 애련지다. 감히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격스러운 아름다움이다.
조선 왕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만들었다는 ‘ㄷ’ 자형의 돌문 ‘불로문(不老門)’을 지나면 애련지와 애련정의 단아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예로부터 애련지에는 두 개의 정자가 있다고 전한다. 이는 하나는 물 밖에, 또 하나는 물 안에 있다는 의미다. 오늘 역시 연못 위에서는 애련정의 고운 춤사위가 펼쳐지고 있었다.
의두합은 효명세자가 공부하며 지냈던 곳으로, 학문을 익히는 자의 중요한 마음가짐 중 하나인’절제’가 잘 느껴지는 건축물이다. 오른편에는 한 칸 반짜리 건물인 운경거가 단청도 없이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세 번째 보물은 애련지에서 몇 걸음 들어선 연경당이다.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시행한 곳으로, 그 형세가 사대부 집을 연상케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99칸의 사대부와 달리 120칸을 지어 임금의 권위를 보였다는 것. 민가의 양식을 빌려 온 궁가로 조선 후기 건축의 진수이자 백미라고 들 한다.
담장을 타고 흐르는 기와 물결에도 소박한 아름다움이 배었다. 고 최순우 선생은 연경당을 ‘겸허와 실질과 소박의 아름다움과 그다지 흥겨울 것도 그다지 초라할 것도 없는 한국적 품위를 가진 곳’으로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11월의 연경당을 ‘가을 빗소리에 낙엽이 촉촉이 젖는 다오, 인적도 새소리도 끊긴 비원을 찾으면 빈 숲을 등진 연경당은 마치 젊은 미망인처럼 담담하고 외롭다’고 일렀다.
연경당에 머물고픈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반도지와 존덕정 일원을 찾았다. 오늘 만나볼 네 번째 보물이다.
관람정이 있는 연못을 ‘반도지’라 부른다. 그 모양새가 한반도지도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는 고종 때 복원을 하면서 연못의 모양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후원을 통틀어 가장 특이하고 이색적인 정자가 바로 존덕정이다. 정조가 직접 지시하여 짓게 되었다는 존덕정은’육면정’이라 불렸다. 6각을 따라 이중으로 세워진 기둥이 이색적이다. 천장에 그려진 두 마리 용과 여의주는 임금의 지엄함을 표현하고 있다.
존덕정 서쪽에 위치한 폄우사는 송나라 학자 장재의 좌우명 ‘폄우(砭愚)’에서 나온 말로 ‘어리석음을 고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존덕정 일원의 관람정, 승재정, 폄우사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 선조들의 미학이 얼마나 탁월하면서도 소박했었는지 느낄 수 있다. 자연 위에 군림하지 않으면서도 멋과 기품을 한없이 뽐내고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후원의 가장 뒤편, 깊이 자리하고 있는 옥류천으로 향했다. 미로처럼 굽이진 숲길을 따라 보물찾기하듯 옥류천을 찾아 나선다. 산 능성이와 계곡을 오르내리며 막막하고 답답했던 가슴 한쪽에 여유가 들어선다. 그렇게 품은 깊은숨으로 복잡한 생각은 쓸어버리고, 옥류천의 풍경에 나를 온전히 맡긴다.
옥류천 일원에는 소요정을 중심으로 청의정, 태극정, 취한정, 농산정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소요정 옆으로 소요암을 타고 흐르는 옥류천이 중심이 된다. 순조는 옥류천에 있는 정자 중 유상곡수의 미가 있는 소요정을 최고로 쳤다. 이는 숙종의 <소요관천>과 정조의 <소요정유상>이란 시에도 남겨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옥류천의 물이 줄어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이다.
후원 산책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 나오는 숲길에서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했던 한국의 미를 다시금 떠올린다. 지나는 나무 한 그루에도 소홀함을 두지 않고, 자연을 보기 좋게 만들기보다 자연 속에 나를 가져다 놓아 어울리게 만드는 선조들의 마음가짐을 우린 잊고 살았다.
조선의 안식처이자 무릉도원이었을 창덕궁 후원길을 걸으며 과연 우리의 ‘후원’은 어디쯤 있을까 떠올려 봐도 좋겠다.
관람정보
궁궐 내 전각 매표 및 입장시간: 4월~10월 9시~17시30분 / 11월, 3월 9시~16시30분 / 12월~2월 9시~16시
궁궐 내 후원 매표 및 입장시간(인터넷 예약 가능): 4월~10월 9시~16시30분 / 11월, 3월 9시~15시30분 / 12월~2월 9시~15시30분
수화해설시간: 10시, 14시(1일 2회, 인터넷 예약 필수)
교통안내: 지하철 종로3가역 (1, 3, 5호선) 6번 출구 도보 10분, 안국역(3호선) 3번 출구 도보 5분 | 버스 간선(파랑) 109, 151, 162, 171, 172, 272 / 지선(초록) 7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