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전상현 기자) 필리핀 제일의 휴양지 세부에서 배로 한 시간 거리에 필리핀에서 열 번째로 큰 섬이 있다.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세부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 정도로 이름을 알린지 이제 10 년쯤 된 ‘어린 여행지’ 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지의 섬’ 이기도 했던 이 섬의 정식 명칭은 보홀 (Bohol).
보홀섬에 평지가 거의 없는데다 대부분은 자연보호 구역으로 묶여있어 좋든 싫든 개발이 더딜 수 밖에 없었고 여행 인프라의 부족은 곧 여행자들의 외면을 의미했다. 동남아 최고의 휴양지 옆에 태고적 자연생태가 온전히 보전될 수 밖에 없었던 비결이었다. 이쯤되면 보홀의 여행 콘셉트가 ‘자연’ 과 ‘탐험’ 에 맞춰지는 것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 아무리 필리핀의 바다가 끝내 준다고 한들, 여행내내 바닷바람을 쐴 수는 없다. 매혹적이다 못해 치명적인 바다빛을 잠시 잊으러 떠나는 길, 보홀의 속살을 살펴 볼 차례다.
작은 생명들의 경이로움 – 나비농장
사실 지난밤, 잠을 설쳤다. 아바탄강을 비춘 별빛과 반딧불의 군무가 얼마나 큰 감동을 주었던지 밤새 미지의 강을 유람하는 꿈을 꾼 탓이다. ‘이 작은 생명들에게 경외심을 가질 수 있구나’ 싶던 마음은 얼마 못 가 다시 한 번 실제로 재현됐다. 일명 ‘나비농장 (Butterfly Conservation center)’ 이라 일컫는 곳에서 였다.
매표를 하고 농장 안으로 들어서자 멀쩡하게 생긴 가이드 한 명이 따라 붙는다. 이리보고 저리 봐도 생긴건 딱 필리피노인데, 그의 입에선 유창한 한국어가 쉴 새 없이 내뱉어 졌다. “이게 나비 새끼(애벌레 ) 인데 살아있어요. 만져봐요” 라고 말하더니 슬쩍 겁을 주는 것은 예사일이고, “나비가 붕가붕가하면 알을 낳는 거에요” 같은, 낯빛이 붉어지는 언행(?)도 서슴지 않았다. 여기에 익살스런 표정까지 더하면 손님들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한다. 아무렴, 지금까지 겪어온 ‘전 세계의 나비농장’ 중 가장 웃기고 흥미롭다고나 할까. 안 웃을래야 안 웃을 수 없었다.
보홀 나비농장의 분위기가 유쾌한 것과 반대로 이곳이 설립된 뒷 이야기가 퍽 흥미롭다. 필리핀에 1,000 여 종이 넘는 나비가 서식하는데, 그 중에서 300 종 이상이 보홀에 서식할 정도로 보홀은 ‘나비의 천국’ 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예로부터 필리피노들에게 나비는 ‘사람들과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해충’ 이라는 편견이 강했고, 나비 생태계가 파괴되는데 이르렀다.
이런 생태학적 가치를 일찌감치 깨달은 네덜란드인 ‘Cristy Burlace’ 씨가 ‘개발을 통해 보존을 하겠다’ 는 신념하에 2002 년 ‘나비농장 프로젝트’ 를 기안해 2006 년에 설립했다는 것. 설립한지 올해로 꼬박 10 년을 넘어선 이곳은 보홀 에코투어의 심장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곳에서 지향하는 가치는 ‘공존’ 과 ‘이해’ 였다. 나비가 어떻게 먹이를 먹고 살아가는지, 새 생명의 탄생은 어떤 과정을 거쳐 빛을 보는지, 왜 나비를 보호해야하는지를 유쾌하고 재미있게 풀고 있다. 대신 판단은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실제로 농장 안에는 100 여 종류의 나비와 그들이 좋아하는 꽃과 나무들을 가꾼 ‘열대 정원’ 과 ‘산책로’ 가 잘 조성돼 있다. 여행자들은 한 걸음씩 걸으며 나비들을 만나면 될 일이다. ‘함께 살아가는 가치’ 가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직접 느낀것을 토대로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같이의 가치 – 타르시어 보호센터
열대우림 한 가운데, ‘비탈길 조심’ 이나 ‘낙석주의’ 도 아닌 ‘조용히 하시오’ 라는 경고문을 몇 번이나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급기야 주차장에는 ‘경적을 울리지 마시오’ 라는 글귀가 위협적으로 적힌 현수막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보통 예민한건 아닌가보다 싶더랬다. 정식 명칭으로는 타르시어 (Tarsier). 좀 더 잘 알려진 별칭으로 ‘ 안경 원숭이 ’ 를 만나는 과정은 조심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사실 하하껄껄 웃고 떠들었던 ‘나비농장’ 을 다녀온 직후라 얼마나 적응이 안됐는지 모른다.)
정적만이 감도는 열대우림 . 사람 한 명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군데 군데 타르시어가 나무기둥을 붙잡고 있다. 어떤 녀석은 천하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또 어떤 녀석은 익살스런 표정으로 관람객들을 맞이 한다. 보통의 야생동물 보호센터와의 차이점이라면 센터 직원 한 명당 타르시어 한 마리를 밀착 마크하고 있다는 점. 주변 환경이 바뀌면 스트레스를 받아 자살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이곳에서는 그 어떠한 소음이나 인공적인 빛이 허락되지 않는다. 워낙 예민해서 카메라 셔터음이나 플래쉬는 물론, 작은 생명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모든 ‘방해요인’ 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생김새는 더욱 특이하다. 몸 길이 13 센티. 개구리의 그것과 흡사한 네 발. 안경 쓴 것 같은 큰 눈은 180도를 볼 수 있어 지구에 사는 생명이라기 보다는 외계생명. 그 중에서도 이티(E.T) 와 형제라고 해도 믿겠다. 이런 ‘낯선 귀여움’ 이 결국 타르시어를 명종위기종으로 몰아넣었다. 밀렵꾼이 등장하며 개체수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날히 개발되는 보홀에서 개체수를 지켜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칼리토 피자라스(Carlito Pizarras)’ 씨가 ‘필리핀 타르시어 보호재단(PTFI) 를 설립해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을 나서서 하게 되었나요?” 라는 질문에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 이라던 그의 호기로운 대답과 미소에서 수 년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광고카피가 문득 떠올랐다. ‘같이의 가치’. 이 작은 생명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글 사진: 전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