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재 기자 ㅣ 미디어원
선동열은 사라졌다. 2018년 대한민국 야구대표팀 감독이었던 그는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국회 국정감사장에 끌려 나와 선수 선발의 적절성을 추궁당했다. 사과하든지 사퇴하라는 말이 국회의원의 입에서 나왔고, 아시안게임 우승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느냐는 조롱까지 뒤따랐다. 집에서 TV로 야구만 보는 것이 감독의 일이냐는 취지의 질책까지 나왔다. 선동열은 청탁은 없었으며 경기력만 보고 뽑았다고 항변했지만 한 달여 뒤 물러났다. 그 뒤로 그는 한국 야구의 중심에서 지워졌다.
그가 어떤 투수였는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한국 프로야구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투수였고, 타자들이 그의 등판 자체를 두려워하던 시대가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국정감사장에서 그 역사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마운드에서 쌓은 것은 마운드 밖에서 통하지 않았다.
8년이 흐른 지금, 같은 대본이 다시 상영되고 있다. 이번 주연은 홍명보다.
2026년 7월 30일 홍명보 전 국가대표팀 감독은 정몽규 전 대한축구협회장과 나란히 국회 청문회 증인석에 앉았다. 월드컵 실패, 감독 선임 과정, 협회 운영 전반이 도마에 올랐다. 국회로 끝나지 않았다. 경찰이 붙었고, 대한축구협회는 압수수색을 당했다.
따질 건 따져야 한다.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 감사는 홍명보 선임 과정에서 규정과 절차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 권한 없는 인사가 후보 추천과 면접에 관여했다는 것, 절차 전반이 불공정하고 불투명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축구협회는 설명해야 하고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 한다. 홍명보도 예외가 아니다. 감독으로 실패했다면 그 실패를 평가받고, 어떤 과정으로 그 자리에 앉았는지 설명하고, 수사에서 위법이 드러나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까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우리가 심판하는 게 정말 ‘감독 홍명보’뿐인가
홍명보라는 이름 앞에는 이미 너무 많은 딱지가 붙었다. 무능, 특혜, 의리, 축구협회, 정몽규, 청문회, 수사. ‘의리 축구’와 ‘특혜 감독’이라는 말은 지도자로서의 선택을 비판하는 표현을 넘어 어느 순간 홍명보라는 사람 전체를 설명하는 낙인처럼 소비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열면 실패한 감독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한 조리돌림이 넘실댄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심판대에 오른 것은 대표팀 감독 홍명보인가, 홍명보라는 사람의 평생인가.
1994년 미국 월드컵 독일전에서 중거리슛을 꽂아 넣은 선수도,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그라운드를 지킨 선수도, 스페인과의 8강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킥을 성공시키고 두 팔을 벌려 뛰어가던 사람도 전부 홍명보다. 대한민국 축구가 변방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그 긴 세월, 그는 그라운드 한복판에 있었다. 그 역사는 누가 거저 준 것이 아니라 그가 뛰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감독으로서의 실패와 선임 논란이 터지자, 선수 홍명보의 역사까지 함께 끌려나와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감독을 비판하는 데 2002년의 홍명보까지 끌어내려야 할 이유는 없다. 이상한 일이다. 오늘의 잘못을 벌하려고 어제의 영광까지 지워야 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 갈라야 할 지점이 있다. 정몽규와 홍명보를 같은 저울에 올리는 것은 틀렸다.
정몽규는 오랫동안 대한축구협회의 최종 결정권자였다. 행정 구조를 짜고, 사람을 앉히고, 조직을 굴린 권한을 실제로 쥐고 휘두른 사람이다. 권한이 컸으니 책임도 커야 한다. 협회 시스템이 무너졌다면 회장이 그 대가를 치르는 게 순서다.
홍명보는 그 권력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선수였고 지도자였고, 논란 많은 선임 과정 끝에 결국 그 자리를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 선택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 축구 행정 전체의 실패를 감독 한 명의 어깨에 얹기 시작하는 순간, 이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시스템이 사람을 골라놓고, 시스템이 무너지자 골라놓은 사람 하나를 제단에 올리는 것은 책임 규명이 아니라 손 씻기다.
선동열 때 우리는 무엇을 얻었나
그래서 선동열이 다시 떠오른다. 그때도 명분은 있었다. 국가대표 선발은 공정해야 하고, 병역특례가 걸려 있었으니 관심이 뜨거운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 국회 장면을 지금 다시 보면 남는 질문이 있다.
선동열을 국정감사장에 세워 모욕에 가까운 질책을 퍼붓고 결국 물러나게 만든 뒤, 대한민국 야구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선수 선발 시스템이 완벽해졌는가. 경쟁력이 높아졌는가. 국가대표 운영이 투명해졌는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바뀐 건 분노를 쏟아부을 표적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뿐이다.
선동열은 그렇게 떠났다. 시간이 지나자 그를 국정감사장까지 불러 세운 게 옳았느냐는 뒤늦은 반성이 나왔지만, 이미 늦었다. 한 사람에게 남은 상처는 사회의 뒤늦은 반성으로 복구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사람을 평가할 때 공과 과를 함께 볼 줄 모른다. 좋아하면 전부 미화하고, 싫어지면 전부 부정한다. 어제까지 영웅이었던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가 평생 이룬 것은 순식간에 없던 일이 되고, 한 번 악인이 되면 과거까지 소급해 악인이어야 직성이 풀린다.
정치에서도, 연예계에서도, 역사 논쟁에서도 수없이 본 이 장면이 스포츠라고 다를 리 없다. 언론이 달려들고 유튜브가 달려들고 SNS가 달려들고 정치가 달려든다. 저마다 검증한다고 말하지만, 그 화력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쏟아지는 순간 검증은 사라지고 공개처형만 남는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드디어 책임을 물었다고 자축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사라지면 다음 표적을 찾는다. 문제는 그대로인데 죽는 사람만 바뀐다.


홍명보가 사라지면 한국 축구는 좋아질까
아마 홍명보도 사라질 것이다. 청문회에 이어 선임 과정에 대한 경찰 수사까지 겹친 지금, 그가 다시 한국 축구의 중심으로 돌아오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면 모두 행복해질까. 홍명보가 사라지면 대한축구협회 행정이 투명해지나. 감독 선임 시스템이 바뀌나. 유소년 축구가 좋아지나. K리그와 국가대표팀의 구조적 문제가 풀리나. 월드컵에서 더 잘하게 되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는 건강하다. 그러나 분노를 풀 곳이 필요해서 사람 하나를 골라 생애 전체를 짓밟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홍명보에게 책임이 있다면 딱 그만큼만 물으면 된다. 축구협회에 책임이 있다면 축구협회에, 정몽규에게 책임이 있다면 정몽규에게, 정치권이 책임질 몫이 있다면 정치권에도 물어야 한다. 그게 책임이다. 분노를 한 사람에게 몰아붓고 퇴장시키는 건 책임이 아니라 가장 값싼 대체재일 뿐이다.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한다. 대표팀 감독 홍명보가 어떤 평가를 받든, 2002년 6월의 홍명보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잘못한 오늘이 있다면 오늘을 비판하면 그만이다. 잘못한 오늘을 벌하겠다고 영광스러웠던 어제까지 짓밟을 필요는 없다.
선동열은 그렇게 사라졌다. 이제 홍명보도 사라질지 모른다. 사람 하나를 또 축구판 밖으로 밀어낸 뒤 우리는 잠시 후련할 것이다. 그때 한번 묻고 싶다.
선동열이 사라졌을 때 대한민국 야구는 더 행복해졌는가. 홍명보까지 사라지고 나면 대한민국 축구는 정말 더 행복해질 것인가. 그리고 그다음엔, 누구를 사라지게 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