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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재 칼럼] 애국심으로 뛰라던 시대는 끝났다…한국 엘리트 체육은 무엇으로 선수를 뛰게 할 것인가

79개에서 30개대로 곤두박질친 아시안게임 금메달…낡은 ‘희생의 엔진’ 떼어낸 자리에 우리는 어떤 ‘새 엔진’을 달았는가

훈련을 마친 뒤 트랙에 홀로 앉아 있는 한국 육상선수 재구성 이미지
낡은 희생의 스포츠에서 선수 스스로 목표를 선택하는 시대로 한국 엘리트체육은 새로운 동력을 요구받고 있다. 재구성 이미지. © 미디어원 편집부

메달이 줄어들었다. 그것도 가파르고 완연한 하향 곡선이다.

숫자는 냉정하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58개였던 한국의 금메달은 2010년 광저우 76개, 2014년 안방 인천에서 79개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환호는 거기까지였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에서 49개로 꺾이더니 2022년 항저우에서는 42개로 주저앉았다. 2026년 일본 아이치·나고야의 풍경은 한층 더 삭막하다. 대회 막바지인 10월 3일 현재 금메달은 30개대 중반에 턱걸이하고 있다. 1998년 방콕 이후 굳건히 지켜왔던 ‘아시아 압도적 2강’의 간판은 이미 일본에 내준 지 오래고, 이제는 중국과 일본을 쫓기는커녕 급부상한 인도, 우즈베키스탄, 이란의 거센 추격을 방어하기 급급한 처지다.

성적이 곤두박질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손쉬운 진단이 있다. “요즘 선수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다”, “투혼과 끈기가 실종됐다.” 하지만 이런 낡은 넋두리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1편에서 짚었듯, 한국이 세계에 전수한 첨단 양궁·스포츠 기술을 흡수한 아시아 각국이 막대한 자본과 과학적 데이터를 앞세워 국경을 허문 것은 외적인 요인이다. 그러나 진짜 붕괴의 진원지는 바깥이 아니라 우리 안쪽에 있다. 대한민국 엘리트 체육을 수십 년간 지탱해 온 내부의 엔진 자체가 수명을 다해 멈춰 섰기 때문이다.

국가가 쥐어짜던 ‘투혼’이라는 이름의 가혹행위

기성세대가 기억하는 국가대표의 삶은 가혹하리만치 단순했다. 운동을 시작한 소년·소녀에게 교실의 책걸상은 사치였다.

사계절 내내 합숙소에 갇혀 먹고 잤다. 선배의 가혹행위는 위계라는 명목으로 용인됐고, 지도자의 폭언과 매질은 팀을 하나로 묶는 ‘카리스마’로 둔갑했다. 인대가 끊어지고 뼈가 부러져도 붕대를 감고 뛰어야 ‘투혼’이라는 훈장이 붙었다. 가슴에 박힌 태극마크는 개인의 영광 이전에 국가를 위해 온몸을 바쳐야 한다는 무거운 징발 영장이었다. 국제대회 시상대 꼭대기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온 국민이 함께 눈물을 훔쳤던 것은, 개인의 고통과 국가의 위신을 동일시했던 그 시대의 비장한 집단 최면 덕분이었다.

집념과 인내, 그리고 국가주의적 애국심.

분명 그것은 한국 스포츠를 세계 10위권의 ‘메달 공화국’으로 밀어 올린 가장 강력한 물리적 동력이었다. 그러나 그 성공 신화의 이면은 언제나 피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승리를 위해 일상화된 폭력이 묵인됐고, 최소한의 배움과 인격적 존엄은 메달의 제단 위에 바쳐졌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선수의 생사여탈권이 흔들리던 그 야만적 병영 체제를 해체하고, 학생 선수의 학습권과 기본권을 되돌려 놓은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진보이자 지극히 당연한 마침표였다.

그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가서도 안 된다.

태극기 아래 단체 체력훈련을 하는 한국 선수단 재구성 이미지
합숙과 반복훈련, 위계와 희생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한국 엘리트체육의 과거 훈련 문화를 표현한 재구성 이미지. © 미디어원 편집부

“참아라” 다음의 언어를 잃어버린 체육계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스포츠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폭력을 걷어내고, 폐쇄적인 합숙을 금지하며, 선수에게 교과서를 쥐여준 것은 옳았다. 그러나 엘리트 스포츠의 본질에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법칙이 하나 존재한다.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쥐어짜는 극한의 훈련량과 치열한 승부욕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100미터 트랙에서 0.01초를 줄이기 위해 수년을 바쳐야 하고, 활시위 끝 10점과 9점을 가르는 수 밀리미터의 차이를 지배하기 위해 하루 수천 번의 활을 당겨야 한다. 축구와 농구 같은 구기 종목에서는 팀의 승리를 위해 나의 득점 욕망을 꺾고 궂은일을 도맡는 헌신이 필수적이다.

타율적 강압이 사라졌다면, 그 자리를 채울 ‘자율적 열망’의 동력이 들어왔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 스포츠 행정은 낡은 엔진을 떼어내는 데만 급급했을 뿐, 새 엔진을 달아주지 못했다.

과거의 지도자들은 “참아라”, “시키는 대로 뛰어라”, “국가대표가 이것도 못 견디냐”며 선수를 채찍질했다. 이제 그런 폭압은 통하지도 않고 허용돼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지금 선수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가. 우리는 “참아라” 다음의 언어를 아직 찾지 못했다.

“폭력과 억압을 걷어낸 자리에 무엇을 채웠는가. ‘참아라’ 다음의 언어를 찾지 못한 채, 성적이 떨어질 때마다 ‘요즘 선수들은 정신력이 없다’며 등을 떠미는 것처럼 비겁하고 게으른 진단은 없다.”

프로 무대가 번성한 축구와 야구라면 거액의 연봉이라는 자본주의적 보상이 강력한 유인이 된다. 그러나 양궁·역도·레슬링·사격·체조처럼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아마추어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게 무엇으로 그 살인적인 고통을 감내하게 할 것인가.

애국심을 들이밀기엔 개인의 자아를 중시하는 청년 세대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일부 남성 선수에게 유효했던 병역특례는 여성 선수와 비올림픽 종목 선수들에게는 애초에 닿지 않는 신기루다.

결국 남는 것은 단 하나, “내가 내 인생을 걸고 세계 정점에 서고 싶다”는 선수 내면의 순수한 자기 성취의 열망뿐이다. 현대 엘리트 스포츠의 시스템은 바로 이 열망을 불태울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선수의 움직임을 데이터로 분석하는 한국 스포츠과학 훈련 재구성 이미지
복종과 강압 대신 데이터·스포츠과학·전문 코칭으로 선수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새로운 훈련 시스템이 요구되고 있다. 재구성 이미지. © 미디어원 편집부

복종이 아닌 ‘납득’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시스템

진정한 선수 인권은 훈련량을 줄이고 땀을 덜 흘리게 만드는 게으른 타협이 아니다. 세계 정상을 꿈꾸는 선수에게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적 훈련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도화된 선수의 권리다.

과거의 방식이 지도자가 몽둥이를 들고 앞에서 끌고 가는 구조였다면, 미래의 방식은 선수가 스스로 세운 목표를 향해 달릴 때 첨단 시스템이 뒤에서 강력하게 밀어주는 구조여야 한다.

주먹구구식 체벌 대신 정밀한 스포츠 생체역학과 데이터 분석이 붙어야 한다. 부상을 억지로 참아내다 선수 생명을 갉아먹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부상을 선제적으로 예측하고 회복을 단축하는 스포츠 의학 인프라가 24시간 가동되어야 한다. 지도자는 ‘호랑이 감독’이라는 허울 좋은 위계의 완장을 내려놓고, 선수의 잠재력을 한계치까지 이끌어내는 고도의 전술가이자 멘탈 코치가 되어야 한다.

특히 개인의 희생이 필수적인 단체 구기 종목일수록 리더십의 본질은 ‘복종’에서 ‘납득’으로 진화해야 한다. 내가 왜 주전에서 밀려 벤치에 앉아야 하는지, 내가 왜 화려한 슛 대신 몸을 던져 수비를 해야 하는지 데이터와 전술적 논리로 선수를 이해시키지 못하는 지도자는 현대 스포츠에서 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퇴와 동시에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비극의 사슬을 끊어내야 한다.

선수의 평균 은퇴 연령은 고작 23.6세다. 운동을 그만두는 순간 절반에 가까운 청년들이 진로를 찾지 못해 무직으로 내몰리는 사회에서, 어떤 학부모가 자녀에게 인생을 걸고 엘리트 선수의 길을 권유하겠는가. “모든 것을 바쳐 운동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은퇴 후에도 스포츠 산업과 사회 전반에서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경력 전환의 안전망을 국가가 함께 깔아주어야 한다. 저변이 말라비틀어진 엘리트 체육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우리는 아직 결승전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한때 아시안게임은 국가 전체를 멈춰 세우던 메머드급 축제였다. 금메달 하나에 정규 방송이 중단됐고, 전 국민이 TV 앞을 지켰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은 국가대표라는 껍데기에 무조건 열광하지 않는다. 손흥민이나 안세영 같은 독보적인 스타의 서사, 혹은 숙명의 한일전처럼 콘텐츠 자체의 완성도와 서사가 있을 때만 지갑과 시선을 연다. 대중에게 무조건적인 애국 소비를 강요할 수 없듯, 선수에게도 무조건적인 멸사봉공을 요구할 수 없는 시대다. 스포츠 역시 관객을 매혹하는 문화 콘텐츠이자 산업으로 자립해야 살아남는다.

다시 강조하지만, 과거의 군대식 합숙소로 돌아가자는 시대착오적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역사의 쓰레기통에 내버린 실패한 과거다.

문제는 우리가 낡은 엔진을 떼어낸 뒤, 그 빈자리에 아무런 동력 장치도 채워 넣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극한의 기량을 끌어내는 첨단 과학 시스템, 복종이 아닌 납득과 신뢰로 소통하는 선진 지도력, 은퇴 후의 삶을 뒷받침하는 스포츠 복지망, 그리고 국가의 명령이 아닌 선수의 꿈이 주어가 되는 동기부여. 이 새로운 엔진을 장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국제대회가 끝날 때마다 “요즘 애들은 정신력이 썩었다”는 낯부끄러운 변명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축구는 기적 같은 4연패를 이뤄냈지만, 양궁의 28년 아성은 무너졌고 여자골프는 사상 처음으로 노메달의 수모를 겪었다.

환호와 한숨 뒤편에서 한국 스포츠의 시스템 전체가 거대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시대는 변했고, 선수는 달라졌으며, 아시아는 저만치 앞서 달리고 있다.

한국 스포츠가 따내야 할 가장 어렵고 위대한 금메달은 더 이상 시상대 위에 놓여 있지 않다. 선수의 인격과 존엄을 완벽히 지켜내면서도 기어이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게 만드는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쟁취해야 할 진짜 금메달이며,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 그 결승전의 출발선에도 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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