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News 상대를 죽여야 사는 전쟁터… ‘타협의 기술’을 잃어버린 나라

상대를 죽여야 사는 전쟁터… ‘타협의 기술’을 잃어버린 나라

선악의 이분법과 승자독식이 낳은 사막화, 독일·영국식 정밀 연합 계약으로 새 길 열어야

붉은빛과 푸른빛의 대립으로 반으로 쪼개져 무너지는 네오클래식 의회 대리석 기둥
상대를 절멸시켜야 끝나는 양극단의 대립은 정치 시스템 전체를 붕괴시키는 사막화로 이어진다. /그래픽=이만재 기자

지금 대한민국 국회와 정치판은 대화와 타협의 전당이 아니라, 상대를 절멸시켜야만 내가 살아남는 거대한 콜로세움이다. 정치는 본디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들이 한정된 자원과 권력을 나누기 위해 벌이는 ‘고도의 거래이자 조정의 기술’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정치는 상대를 대화의 파트너가 아닌 ‘청산해야 할 적’이자 ‘악마’로 규정하는 내전(內戰) 상태로 전락했다.

선거는 승자가 100을 다 가지고 패자는 0으로 떨어지는 ‘올 오어 나씽(All or Nothing)’의 도박판이 되었고, 패배한 쪽은 다음 선거까지 복수의 칼을 갈며 국정을 마비시킨다. 이 끔찍한 승자독식의 쳇바퀴 속에서 국민의 삶을 보듬을 정책적 타협과 미래 아젠다는 완전히 실종됐다.

‘잡탕 빅텐트’라는 만성 질환… 억지 결혼이 낳은 내부 총질

한국 정치가 이토록 황폐해진 결정적 원인 중 하나는 선거 때마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영혼 없는 빅텐트(잡탕 통합)’ 환상에 있다. 보수든 진보든 내부의 이념적 스펙트럼과 노선 차이를 치열하게 조율해 제도화하기보다는, 선거 승리라는 단기적 목표를 위해 전혀 이질적인 세력들을 하나의 정당이라는 좁은 우리 안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그 역사의 출발점에는 1990년 3당 합당이 있었다. 민주화 이후 군부 권위주의의 잔재와 민주화 세력이 이념적 성찰 없이 화학적 결합을 시도한 결과, 한국 보수는 본래의 자유주의적·공화주의적 가치 정립을 유예당한 채 ‘선거 공학적 이합집산’의 늪에 빠졌다.

이후 한국 정치사는 억지 통합의 부작용으로 점철됐다.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세력이 단일 정당에 갇히다 보니, 정작 상대 진영과 싸우기 전에 당내에서 공천권과 헤게모니를 놓고 이전투구를 벌였다. 보수는 수도권 실용주의와 영남 정통파, 엘리트 법조 세력 간의 핏빛 권력투쟁 끝에 ‘내부 총질’과 ‘배신자 낙인찍기’로 자멸했고, 진보 역시 도덕성과 선명성의 깃발이 무색하게 계파 패권주의에 갇혀 자정 능력을 잃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무조건적 통합은 단결이 아니라 가장 추악한 분열의 도화선이었다.

서로 다른 재질의 기하학적 블록들이 경계를 유지한 채 맞물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모듈형 교량 건축
고유의 형태를 유지한 블록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다리를 완성하듯, 성숙한 정치는 다양성의 연대에서 출발한다. /그래픽=이만재 기자

서구 민주주의는 어떻게 ‘다름’을 다루었는가

그렇다면 다당제와 합의 민주주의가 정착된 서구 선진국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풀었는가. 그들은 결코 가치가 다른 정당들을 ‘하나의 당으로 합당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각자의 깃발과 정체성을 철저히 지키게 하되, 선거 후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정밀한 ‘계약(Agreement)’을 맺었다.

독일의 사례는 대표적이다. 기독민주당(CDU)과 사회민주당(SPD)은 세계관이 완전히 다른 앙숙이지만, 국가적 위기나 선거 결과에 따라 ‘대연정(Große Koalition)’을 꾸린다. 그들이 뭉치는 방식은 감정적 화해가 아니다. 수백 쪽에 달하는 ‘연정 협약서(Koalitionsvertrag)’를 수개월간 치열하게 협상하며, 각 부처의 장관 지분, 양당의 핵심 정책 반영 비율, 이견 발생 시의 중재 절차를 조문 하나하나 못 박아 둔다. 서로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상거래처럼 권력과 정책을 나누는 것이다.

소선거구제의 종주국인 영국 역시 마찬가지다. 2010년 총선에서 단독 과반 정당이 나오지 않는 ‘헝 의회(Hung Parliament)’가 발생하자,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과 자유민주당의 닉 클레그는 5일 밤낮에 걸친 협상 끝에 70년 만의 연립정부를 출범시켰다. 자민당은 보수당의 긴축 정책을 일부 수용하는 대신 선거제도 개환 국민투표와 교육 예산 확보라는 알맹이를 챙겼다.

스웨덴과 네덜란드 등 북유럽 합의제 국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연정에 공식 참여하지 않는 정당과도 ‘신임과 공급(Confidence and Supply)’ 협약을 맺고 사안별로 예산안과 주요 법안을 거래하며 국정 안정을 꾀한다. 그들에게 정치는 상대를 죽이는 칼이 아니라, ‘지분을 인정하고 파이를 나누는 타협의 예술’이다.

한 톨의 볍씨가 되어 판을 짤 ‘중재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우리는 왜 이런 연합정치를 하지 못하는가. 첫째는 ‘협상의 문법’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를 밟아 이겨야만 승리라고 착각하는 무능한 권력욕이 협상의 싹을 자른다. 둘째는 ‘희생하는 원로’의 실종이다. 과거 제왕적 총재(YS, DJ) 시절의 수직적 질서가 붕괴한 뒤, 각 세력의 이해관계를 냉정하게 저울질하며 지분을 쪼개주고 판을 묶어줄 신뢰받는 중재자가 사라졌다. 오늘날 정계 원로라는 이들은 스스로 한 톨의 볍씨가 되어 썩어질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계파 뒤에 숨어 노욕(老慾)을 채우며 분열을 부추긴다.

이제 한국 정치는 낡은 권위주의와 기만적인 빅텐트의 환상을 깨뜨려야 한다. 서로 다른 결을 가진 세력들이 각자의 당을 만들어 독자적 생명력을 확보하되, 밖에서 동등하게 마주 앉아 사안별로 정책을 거래하고 선거 연대를 구축하는 ‘플랫폼 연합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어설프게 한 냄비에 섞어 끓인 맹탕 정치로는 더 이상 복잡다단한 21세기 대한민국을 이끌 수 없다. 본지는 총 5회에 걸친 특별기획을 통해 한국 정치를 지배해 온 ‘적대적 공생’과 ‘잡탕 통합’의 파멸사를 냉정하게 해부하고, 서구 민주주의의 협상 메커니즘을 접목한 새로운 ‘우파 및 한국 정치 연합 모델’의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하고자 한다. 정치가 절멸의 무기에서 공존의 기술로 진화하기 위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정찬 발행인 미디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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