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비상계단은 너무나 익숙하고 열려 있는 일상의 공간이다. 국내 소방법상 피난로는 상시 개방이 원칙이라, 아파트든 고층 빌딩이든 운동 삼아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해외로 눈을 돌리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미국이나 호주 등 서구권의 고층 빌딩이나 호텔에서 한국 생각만 하고 비상구 철문을 밀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찰칵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밖에서는 열리지 않는 ‘패닉 락’에 갇히거나, 비상 경보가 울리며 보안 요원이 들이닥쳐 퇴거 요구를 받는 일이 다반사다. 9·11 테러 이후 영미권 건축물의 비상계단은 도시에서 가장 차갑고 엄격하게 격리된 ‘절대 보안 구역’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보안 카메라와 경비실의 요주의 대상이 되는 이 삼엄한 콘크리트 미로가, 1년에 단 하루 전 세계 러너들의 거친 숨소리와 발소리로 뒤흔들리는 진풍경이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펼쳐졌다.

지상 86층 1576개 계단… 합법적으로 열린 ‘금단의 통로’
미국 뉴욕의 심장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SB)에서 열린 제48회 ‘연례 전망대 런업(Run-Up)’ 현장이다.
엘리베이터라면 1분 남짓이면 닿을 지상 86층의 높이. 그 아득한 허공을 향해 수직으로 뻗은 1576개의 콘크리트 계단을 오직 두 다리의 근육과 폐활량만으로 치고 올라간다. 평소 같으면 외부인의 발길이 철저히 차단된 채 감시 카메라만 번뜩이던 어두운 계단참이, 이날만큼은 전 세계 200여 명 철각들이 한계를 시험하는 합법적인 수직 경기장으로 변모했다.
올해의 월계관은 11분 18초 만에 86층 결승선을 끊어낸 일본의 료지 와타나베에게 돌아갔다. 443m 높이의 거대한 건축물을 평지 3km 질주 속도로 주파한 셈이다. 여자부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안네마리 빌헬름이 13분 32초의 기록으로 정상을 밟았다.
하지만 이 레이스가 반세기 가까이 전 세계인의 시선을 붙잡아둔 진짜 매력은 기록 그 너머에 있다. 거대 도시가 가장 철저하게 빗장을 걸어 잠근 ‘금단의 통로’를 내 두 발로 정복해 마침내 맨해튼 하늘 위로 박차고 나온다는 짜릿한 공간적 해방감이다.

폐가 터질 듯한 고통 속에서 마지막 철문을 밀치고 86층 야외 테라스로 쏟아져 나오는 순간, 눈앞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뉴욕의 파노라마 야경과 시원한 가을바람이 쏟아진다. ‘출입 금지’의 삭막한 계단을 딛고 올라온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인 셈이다.
빌딩 입주사 임직원부터 언론인, 일반 시민들까지 동참한 이 극한의 레이스는, 차가운 보안의 마천루를 살아 숨 쉬는 대중문화 축제로 탈바꿈시키는 뉴욕 특유의 공간 마케팅 미학을 여실히 보여준다.
레이스가 끝난 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런업 48주년을 축하하는 몽환적인 보랏빛 조명으로 맨해튼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평소엔 경비원 눈치를 보며 피해 가야 했던 그 삭막한 비상구가, 1년에 단 하루 인간의 땀방울을 통해 도시에서 가장 뜨거운 무대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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