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자(들)》 관련 역사 왜곡 논란으로 여의도와 문화계가 한바탕 난리 법석을 떨었다. ‘암살자들 창작의 자유’ 논쟁이다. 실존 인물의 명예를 훼손했네, 역사를 입맛대로 날조했네 핏대를 올리는 비판 앞에서 정작 정부와 야당 정치인들이 들고나온 논리는 놀랍도록 명쾌하고 당당했다.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창작의 자유를 존중하고 최종 판단은 관객의 몫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서영교, 최민희, 박지원 의원 등 정치인들도 저마다 영화의 작품성이나 픽션의 성격, 창작의 자유를 강조하는 발언을 했다. 충무로의 영화인들 역시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옹호하는 목소리를 냈다.
참으로 아름답고 눈물겨운 ‘창작의 자유 천국’이다. 대한민국 권력과 제도가 앞장서서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상상력을 펼치는 창작의 영역을 옹호하며 멍석을 깔아준 셈이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 거대한 멍석 위에 상상조차 못 했던 특급 먹잇감이 툭 떨어졌다. 바로 현직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둘러싸고 제기된 ‘북한에 둔 27세 딸’이라는 미확인 의혹이다. 정 장관은 이 주장을 가짜뉴스라고 전면 부인하고 법적 대응을 밝혔다. 현재 의혹을 입증할 객관적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단군 이래 이보다 더 완벽한 ‘정치 팩션’의 먹잇감이 있었는가
정 장관은 “터무니없는 색깔론 가짜뉴스”라며 펄쩍 뛰고, 통일부는 유튜브 영상 삭제 신고와 정정보도 요구, 법적 대응 방침을 밝혔다. 그래, 사실 여부는 취재와 증거, 필요하다면 법정에서 따질 일이다.
하지만 지금 창작의 판을 보라. 알고리즘의 간택을 받기 위해, 조회수 몇만을 더 끌어당기기 위해 하루하루 피 말리는 소재 전쟁을 치르는 유튜브 생태계와 웹소설 판, 독립영화 바닥을 보라. 수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어그로는 한계치에 달해 “더 자극적이고 더 새로운 소재가 없다”고 갈증을 호소하던 창작자들에게 이 논란은 그야말로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황금빛 축복이다.
용기 있는 감독 한두 명만 나설 것이라고 보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제 소설로, 웹소설로, 쇼츠로, 웹툰으로, 유튜브 미스터리 다큐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올 것이다.
돈 냄새를 맡은 창작자들에게 이보다 더 구미가 당기는 재료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 2026년 현재 27세라는 이야기의 설정이라면, 시간은 1998~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DJ 정부 시절 ‘햇볕정책’의 훈풍을 타고 남북의 접촉이 이어지던 시절.
- 그리고 2005년 6월 17일, 평양 대동강 영빈관에서 김정일과 단독 면담을 가진 대한민국 실세 장관.
- 2년 뒤 2007년 대선 출마까지, 서로 다른 시대를 가로지르는 정치 미스터리의 무대.
이 연대기는 작가가 활용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이지, 확인되지 않은 사생활 의혹이 실제로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거창한 100억 펀딩이 무슨 대수인가… 온몸의 창작 본능이 꿈틀거린다
이런 특급 소재를 눈앞에 두고 거창한 100억 원짜리 대작 펀딩이나 대기업 투자 따위가 무슨 대수겠는가. 스마트폰 하나만 쥐고 골방에서 연출하는 독립영화 청년도, 팩트와 가상을 절묘하게 교차 편집하는 유튜버도 눈이 번쩍 뜨일 대박의 기회다.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엮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장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뛰쳐나가고 싶다”는 야성적인 창작 본능과 욕망이 활화산처럼 발동할 지경이다.
가상의 주인공에게 분단의 장벽을 넘은 비극적 멜로를 입히든, 권력자를 둘러싼 치밀한 정보 공작의 미스터리로 풀든, 20여 년 뒤 다시 나타나는 가상의 ‘숨겨진 핏줄’의 서스펜스로 달리든, 그것은 온전히 작가의 자유다. 단, 실존 인물에게 확인되지 않은 행위를 사실처럼 덧씌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대들의 ‘창작의 자유’, 이 황금 같은 시나리오 앞에서 만개하라
더 이상 입을 닫고 눈치를 볼 이유가 무엇인가. 문체부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창작의 자유를 강조했고, 영화계도 그 가치를 지키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넓디넓은 멍석 위에 어떤 소재가 올라오든 똑같은 원칙으로 판단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외쳤던 그 위대한 창작의 자유는 결코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내 편의 상상력은 예술이고, 남의 상상력은 가짜뉴스라는 식의 이중잣대가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픽션이라는 이유만으로 허위사실 유포나 명예훼손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든 소설이든 유튜브든 창작자는 작품 첫머리에 ‘본 작품은 작가적 상상력으로 구성한 허구이며 등장인물과 사건은 실제 사실로 확인된 것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고지를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상자는 이미 열렸다. 소재에 목마른 자들이여, 조회수에 굶주린 창작자들이여, 주저하지 말고 카메라를 켜고 펜을 들어라. 문체부 장관과 정치인들이 강조한 창작의 자유라는 그 넓디넓은 멍석 위에서, 그대들의 상상력을 이 ‘원산의 밤과 27세 딸’이라는 논란에서 출발한 가상의 시나리오 앞에서 마음껏 만개시켜라. 관객과 독자들은 이미 극장 문 앞에서, 유튜브 화면 앞에서 팝콘을 들고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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