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김원하 기자) 술잔의 수는 어째서 홀수라야 하는 것일까? 이치는 지극히 간단하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술잔 역시 수치가 꽉 차 버리면 기울게 마련이다. 곧 기울어버릴 만월滿月)보다도 돋아나는 반달을 성스럽게 여기듯이 술잔에도 장차 메워질 여유를 두어야 하기 때문에 꽉 차 있는 짝수보다는 한 구석 비어 있는 홀수를 택하는 것이라 한다. [남태우 교수중앙대, 문학박사)의 〈홀수배 飮酒法의 의식과 허식〉 중]
지금까지 알려진 ‘홀수배’에 대한 이론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가 쌍雙)잔은 안 된다는 ‘주불쌍배酒不雙杯)설’ 또는 ‘주불단배酒不單杯)설’이며, 둘째는 짝수로 끝나는 잔은 멋없음의 상징으로 ‘여유잔餘裕盞)설’이며, 셋째가 ‘음양오행잔陰陽五行盞)설’이다.
어찌 술잔에 홀수배만 고집하며 마시는 술자리만 있을까. 여기에서 더 나아가 풍류를 즐기면서 마시는 ‘풍류잔風流盞)설’과 ‘주당들의 음주법’을 더해 5가지로 구분했다. 그러나 이들 음주법은 명칭만 차이 날 뿐이지 실제로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후자의 2가지 음주법은 주법酒法)을 함부로 어기는 자리가 아니라 흥이 고도로 나면 ‘주색잡기’의 본색이 들어나는 자리다. 그렇다고 주사酒邪)의 자리라고는 할 수 없고, 굳이 따지면 명정酩酊)의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불쌍배 또는 주불단배 설
주불쌍배설의 원칙은 술은 짝을 맞춰 마시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술을 마실 때 잔의 수효數爻)가 짝수로 마침을 싫어함을 이르는 말이다. ‘일무삼소一無三小)하고 오적칠과五滴七過)하니 구취九醉)이니라’는 이론도 여기에 해당된다. 십일광十一狂)은 열한 잔부터 미치며 마신다. 이는 주광이나 취생몽사의 단계다.
기뻐서 한 잔, 외로워서 한 잔, 슬퍼서도 한 잔, 오랜만에 만난 벗과는 불가무일배不可無一杯)다. 그 다음은 주불쌍배라고 해서 마시는 잔의 수가 짝 맞음을 더해 석 잔, 석 잔은 삼소三少)라고 또 한 잔, 술은 다섯 잔이 적당하다고 해서 오선五宣)을 찾고, 칠가七可)라고 일곱 잔을 채운 뒤 두 잔을 채우고 구월불가九越不可)로 아홉 잔을 마시면 과음의 기준을 넘어 술맛을 모르게 된다.
주불쌍배를 주불단배라고도 한다. 한 잔 술이 없다는 뜻으로, 이 경우의 ‘단單)’은 한 잔이라는 뜻이 아니라 두 잔을 가리키는 의미다. 왜냐하면 ‘單’이라는 글자에 ‘입 구口)’가 2개 들어 있으니 두 잔이라는 것이다. 박덕의 잔이 된다.
아직까지 우리는 술좌석에서 예부터 내려오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후래선배後來先杯)’라고 해서 술자리에 뒤늦게 온 이에게 먼저 술을 권하고, 또 ‘후래삼배後來三杯)’라고 해서 술자리에 늦게 온 사람에게 석 잔의 술을 권한다. 술을 건네고 받는 수작酬酌), 술잔을 채워 돌리는 행배行杯), 받은 술을 마시고 다시 채워서 되돌려주는 반배返杯)라는 말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이처럼 수작, 반배 그리고 행배는 음주의 기본행태다. 모두가 홀수배로 해야 함을 또한 내포하고 있다. 즉, 한 잔 술은 있을 수 없고 석 잔은 좀 적은 듯하며, 다섯 잔은 적당하고 일곱 잔은 지나치며 아홉 잔에는 취한다. 그래서 1, 3, 5, 7, 9로 나가는 홀수배가 좋아 홀수 잔으로 술을 마신다고 한다. 아홉 잔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신사협정’이 숨어 있다.
구취의 ‘九醉’와 ‘口臭’는 동음이의어로, 후자의 구취는 고약한 입 냄새를 의미하는 것이니, 아홉 잔 이상 마시면 구취가 난다는 시사적 의미까지 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입에서 나온 언어의 아름답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인 김우영의 홀수배 이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주우지교酒友至交)는 담약수淡若水)라.” 담담하게 품위를 갖추고, 술의 긍지를 음미하며, 자연과 인생을 1, 3, 5, 7과 같은 순배로 적당히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 잔, 고배呱杯:口가 하나)는 어린애 술이며 불가무일배주不可無一杯酒)이어서 안 되고,
두 잔, 단배單杯:口가 둘)는 단순한 술꾼의 술이어서 안 되고, 즉 석 잔의 술이 없다는 뜻에서 시사한 바처럼 이 경우의 단單)은 한 잔이라는 뜻이 아니라 두 잔을 가리키는 의미다. 입 구口)자가 두 개이니 쌍잔을 의미한다. 두 잔은 박덕해서 술 인심을 무례케 한다.
석 잔은 가히 품배品杯:口가 셋)니, 역시 군자는 품위 있는 술이 격에 맞으나 삼소三小)여서 아쉽고, 또한 헤겔이 모든 사물은 정正), 반反), 합合)의 3단계로 발전한다고 한 변증법과 세 사람의 대화는 의미가 통한다. 이렇듯 발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리라 할 수 있다.
넉 잔은 4배四杯)인데, 四자가 죽을 死와 동음이어서 효배囂杯:口가 넷)라고 하는데, 이 경우는 술잔과 주객의 수에 적용되는 이중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입이 넷이라 요란하고 시끄러운 술이니 안 되고, 그래서 입이 셋 모이는 주석酒席)이 가장 품위 있게 마실 수 있는 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오의五宜), 즉 다섯 잔은 적당하고,
일곱 번째 술은 행운의 술이니 좋고,
아홉 번째 술, 구월불가九越不可)해 많으니 안 된다.
천자의 주법
주舟)나라 문왕文王)이 술을 좋아하다보니 궁중에 5000명의 술꾼들이 북적거렸다. 나라 안 각지의 제후諸侯)들은 문왕의 방탕을 보고는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 호시탐탐 왕위를 노렸다. 그래서 근심에 쌓인 문왕의 태자는 궁리 끝에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은거하고 있는 주자酒子)를 갖은 예우 끝에 초빙해 왔다.
문왕의 주법酒法)은 본래 호기 방장한 기풍을 숭상해 고급술을 다량으로 마시면서 주량의 세고 약함을 즐겼는데, 식객 5000명이 두주불사의 기인들로서 문왕의 총애를 취하기 위해 각종 이술과 방외의 주법을 배합해 하루하루를 영위하는, 그야말로 희대의 구경거리였다. 문왕은 태자가 천거했다는 주자에게 말했다.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어온 바이나, 주법은 광대무변하고 심원하여 실로 세상의 실리와 추측으로는 판단키 어렵도다. 그대는 짐에게 어떤 신묘함을 보여줄 수 있는가?”
주자가 말했다.
“저는 열 걸음마다 술 한 동이씩을 비우면서 천리를 가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천하무적이군!”
문왕은 경탄하면서 주자를 쉬게 하고는 5000명의 식객 중에서 주량이 센 5명을 뽑아 주자와 겨루도록 했다. 시합에 들어가기 전 주자는 문왕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제게 주법이 3가지가 있는데 대왕께서 원하는 대로 쓰겠습니다. 먼저 이것을 설명 드리고 시합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과인이 알고 있는 주법과 견주어 볼 것인즉, 어서 아뢰어라.”
“첫째, 천자의 주법이 있고, 둘째, 제후의 주법이 있으며, 셋째, 서인의 주법이 있사옵니다.”
“천자의 주법은 무엇인가?”
“천자의 주법은 북극의 빙하로 술병을 삼고 서역의 사막을 탁자로 삼아 남극의 청해靑海)를 쏟아 붓고 춘하추동의 사시로 덮어 술을 담그는데, 음과 양의 대 기운으로 숙성하여 마침내 뚜껑을 열면 그 향기만으로도 모든 제후가 무릎 꿇고 천하가 항복합니다. 이 술을 한 모금 마시면 천지가 합일되어 그 위용과 정기가 세상을 포용하고, 어진 이들이 심산에서 출세하고 오곡백과가 번창하여 무릇 백성은 치세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바, 이것이 바로 천자의 주법입니다.”
크게 놀란 문왕이 “제후의 주법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제후의 주법은 지혜 있고 용기 있는 선비로 하여금 항아리를 만들고, 어질고 착한 백성으로 탁자를 삼으며, 호걸스러운 무리로 술잔을 빚습니다. 이 주법을 이루면 주위에 맞설 자가 없고,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천하의 영욕과 율법이 보입니다. 하늘로는 해와 달과 별을三光) 본받아 천리를 따르고, 땅으로는 군왕과 어버이와 스승을三尊)을 따르고, 아래로는 사방을 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주법을 펼치면 우레와 번개가 치는 듯해 군웅들이 항복하고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문왕은 탄식을 하면서 “그러면 서인의 주법은 무엇인가?” 하고 재차 물었다.
“서인의 주법은 풀어헤친 머리에 일어선 구레나룻, 숙인 갓에 풀어진 옷자락,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지르며 군왕 앞에서 주정하고 토하면서 갖은 아양과 남을 헐뜯기를 좋아하니, 위로는 겨우 목이나 축이고 아래로는 오장육부를 피폐하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서인의 주법인데 돼지의 섭생과 같습니다. 이제 대왕께서 서인의 주법을 좋아하시니 저는 대왕을 위하여 부끄러이 여기는 바입니다.”
문왕은 그로부터 석 달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5000명의 주객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괭이와 낫을 들었다. 후세에 사람들은 이 신묘한 주자의 문답을 ‘설주경設酒經)’이라 부르다가 ‘주경’으로 통칭했다는 것이다.
주도酒道)가 이처럼 사람 따라 다름은 품격이 있음이고, 체면이 있음이다. 돼지는 돼지처럼 마셔야 하며 왕은 왕처럼 마셔야 국가의 기강이 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천자라 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마셔서는 안 된다는 ‘구월불가’의 주도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