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깨고 떠난다(破離)’라는 말씀을 좀 다르게 새기면 상황이 조금 달라집니다.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늘 그것을, 표면상의 의미만을 중시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고 깨고 떠난다’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래야 문법적인 해석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어려웠습니다. 아직도 배우고 익힐 것이 천진데 언제 깨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언감생심, 감히 시도도 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불쑥 새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안 될 일, 그 뜻을 내 안으로 한 번 가져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키고 깨고 떠난다’를 내 자신의 일로 바꾸어 생각해야 되겠다는 염이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지키되, 또 그것을 과감히 깨고 떠나기를 반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새겼습니다. ‘깨고 떠난다’라는 걸 ‘내 자신의 소박한 경험으로 얻은 것들을 깨고 떠나라’라는 가르침으로 새겨듣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 말이, 어렵기만 하던 그 ‘수파리’의 가르침이, 온전하게 제 안에서 하나의 맥락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익힌다는 것(學習)은 결국 앞에서 익힌 것들을 ‘깨고 떠날’ 때에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앞에서 배우고 익힌 낮은 단계를 고집하지 않고 부단히 그것을 부정해 나갈 때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정작 지킬 것(守)은 그런 ‘수파리’를 몸소 실천한 옛 선인들의 가르침이었고, 깨고 떠날 것(破離)들은 오로지 내 작고 비좁은 경험칙들이었습니다. ‘깨고 떠나는 것’은 공부가 지속되는 한 언제나 멈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없어지면 거기서 공부도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경험을 과신(過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기대 밖의 성공으로 점철된 것들(운이 따라주어서?)에 대해서 애착을 많이 가집니다. 보통은 소박한 것들이 큰 위력을 지닙니다. 불로소득(?)일수록 더 위력이 있습니다. 가히 일당백입니다. 그럴 때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는 말은 듣기(百聞)와 보기(一見)의 대립이 아니라, 소문과 경험의 차별을 뜻합니다. ‘내가 겪어본 일이다’라는 금과옥조를 당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됩니다. 머리로 하는 공부에 치중하는 이들에게서 그런 유형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사람이 크는 것은 어디서나 그 ‘소박한 경험’과의 작별을 마다하지 않을 때입니다. 나를 부정하고 타자의 경지를 스스럼없이 인정할 때 사람은 성장합니다.
선생이 되어 이것저것, 무엇이든 가르치다 보면 반드시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이나 경지로 ‘알아듣게’ 설명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개중에는 모든 앎이 속으로는 다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생각보다 그런 ‘경험칙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사는 우리 인간의 시야 안에 다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크는 것은 일기일경(一機一境)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특히 자기 성찰을 요하는 앎의 세계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수시로 ‘깨고 떠날 일’들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소박한 경험과의 작별’을 끊임없이 스스로 독려하는 것이 공부의 요령일 것입니다. 늘 어제의 것을 버리고 내일의 것을 향할 때 성공한 공부인(工夫人)이 될 수 있습니다. ‘수파리’는 그래서 모든 공부의 헌법이 됩니다. 단지 수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기술’의 측면에서, 공부의 경지를 부단히 업그레이드 시키는 강제(强制)의 규범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넘은 ‘문턱’이 오늘의 ‘내 소박한 경험’이 되어 새로운 ‘문턱 넘어서기’를 가로막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루하루 자신의 존재를 걸고 수련하는 검도에서는 그만한 철칙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검도(平生工夫)였던 것입니다. 수파리는 몸과 정신, 행위(경험)와 인식이 불리(不離)의 경지를 획득한다는 것, 그것을 ‘몸으로 아는’ 것, 그것을 강조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글 이미지: 양선규/대구교육대학 교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