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박철민 칼럼니스트) 누구나 初心을 얘기하지만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하여 傳家의 寶刀처럼 사용하는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단순한 수사에 가까운 거지요.

내력 있는 초시 집안의 천덕꾸러기 아다다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력이었습니다. 재력은 백치취급을 받고 살아온 반벙어리인 그녀를 살리고 죽이고 하지요.

버림받지 않으려 버린 수롱이의 돈 때문에 아다다는 죽습니다. 글쎄요? 이럴 때는 평생 가난에 허덕이다 내 밭을 갖고 싶어서 아껴 모아 둔 돈을 버린, 연인 아다다를 때려 죽인 머슴 수롱이를 탓해야 할까요? 더 이상 금전으로 인해 버림받기 싫어 바다에 버린 아다다의 넋을 위로해야 할까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물질과 권력 앞에 초심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확실하게 너무나도 열심히 잘 살려는 사람들에게 아다다와 같은 캐릭터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백치(?)라고 취급되던 순수의 이름 아다다의 본명은 ‘확실이’였습니다.

무명의 작가 계용묵은 1935년에 발표한 이 작품 <白痴 아다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지만, 다시는 이만한 소설을 써내진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김 약국의 딸들’의 작가 박경리 선생은 <토지>라는 세계문학사의 전무후무한 역작으로 기억되고,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단테는 <신곡>, 셰익스피어는 4대비극 5대희극 중에서도 대표작 <햄릿>으로 기억됩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세계최고의 다방면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기억할 때도, 우리는 그의 수많은 업적 중에서 단 하나 <모나리자>의 미소만을 떠올립니다. 신은 인간에게 능력을 부여했지만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인생 2모작 3모작하는 분들도 많으나 대표작은 하나 뿐인 것입니다.

아다다가 물질만능시대의 외로운 희생자라면, 그 시대나 지금이나 아다다를 죽이는 우리는 모두 가해자입니다. 인도네시아에 있다는 어느 섬의 종족들처럼 신석기 시대의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침입자들에게 날리는 그들의 화살은 어떻게보면 ‘아다다’의 숨결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참 많은 일을 해왔고 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 단 한번뿐인 유한한 삶이므로 도전해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사실 내 삶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의 몸부림이었지요. 하여 나는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成就하신 분들에게 언제나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2모작 3모작 모두 훌륭히 해내는 분들을 보면 그저 감탄과 부러움의 신음만이 토해질 뿐이지요.

‘初心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보는 것입니다.’ 친정어머니와 남편이, 머슴 수롱이가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돌아봤다면, 순수의 화신인 확실이 아다다가 그렇게 죽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침은 찬란한 시작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생의 종착역을 부르는 열차의 출발선이기도 합니다.

초심은 수사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꿈뜰거리는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몫이고 임무라면, 지금 그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사시는 당신은 이미 “초심”을 실천하고 계시는 분이시니까요. 하여 初心은 평범한 사람들이 간직한 연금술이어야 합니다.

사진:픽싸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