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이면의 위기
(미디어원=이정찬 기자) 2025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국의 중장기 잠재성장률이 1%를 밑돌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회예산정책처(NABO) 또한 같은 해 보고서에서 잠재성장률을 1.9%로 하향 조정했다.
수치는 위기를 말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그 원인에 대한 오해다. ‘고령화 = 성장률 저하’라는 단순한 도식은 사실과 다르며, 한국 경제의 진짜 병목은 구조에 있다.
노동력 감소의 진짜 원인 –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2020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숫자의 감소가 아니라, 노동시장 참여율 자체가 낮다는 점이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하며, 청년층은 ‘공무원 준비생’ 혹은 ‘구직 단념자’로 흡수되고 있다. 게다가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노동시간 축소 → 인력 충원 불가 → 생산성 저하’의 악순환이 나타났다. 이것이 실질 노동력 부족을 초래한 구조적 배경이다.
생산성(TFP) 둔화 – 혁신이 멈췄다
한국의 총요소생산성은 201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기술력이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업의 디지털 전환이 규제에 막혀 있고, 신산업이 법제도의 낡은 틀에 갇혀 출발조차 하지 못한다. 또한 교육 시스템은 여전히 ‘학력 중심’에 머물러 산업과 현장 간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투자 대비 성과가 떨어지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고령화는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고령화’는 인구구조의 변화이지, 성장률 둔화의 직접 원인은 아니다. 고령층의 경제활동참여율을 높이고,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는 사회적 구조를 만들면 고령인구도 ‘성장자원’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고령층을 ‘부담’으로만 인식하는 정책적 시야다.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은퇴 후 창업이나 지역사회 활동을 통한 생산적 기여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한국은 아직 이런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대안 – 구조개혁 없인 성장 없다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구조개혁이다. 첫째, 노동시장 유연성과 포용성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 둘째, 교육체계를 직무역량 기반으로 개편해야 하며, 셋째, 신산업 진입을 가로막는 규제를 해소해야 한다. 넷째, 고령층과 청년층 모두를 생산 가능 인구로 포용할 수 있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기부양책’이 아닌 ‘중장기 국가전략’이 지금 필요하다.
현장 목소리 – 중소기업과 청년의 이중고
서울 구로공단의 한 중소기업 대표는 “주 52시간제 이후 신규 채용은 늘렸지만 숙련도가 낮아 생산성은 오히려 떨어졌다”고 말했다. 청년층도 공무원 시험 준비 외엔 뚜렷한 기회가 없다는 점에서, 노동력 부족의 원인은 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치에 있다. 경제가 일자리를 못 만들어서가 아니라, 일하고 싶어도 지속 가능성이 없다는 구조가 문제다.
전문가 시각 – 문제는 ‘인적 자본 전략 부재’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고령화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이 인적 자본 전략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점”이라며, “기술 변화와 산업 구조에 맞춘 노동력 재편이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는 최근 연설에서 “생산성 정체는 단순한 숫자 문제가 아니라, 민간 부문의 혁신을 억제하는 구조 때문”이라며 구조개혁의 시급성을 언급했다.
일본과 독일의 대응은 달랐다
일본은 2000년대 초부터 고령층 재고용 정책과 여성 취업 장려를 병행해 일정 수준의 노동력 보완에 성공했다. 독일은 하르츠 개혁을 통해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며 고용을 확대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이들 국가는 고령화와 성장률 둔화를 무조건 연결하지 않았으며, 정책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나리오 – 성장률이 0%가 되면
잠재성장률이 0% 수준으로 지속된다면, 정부의 세수는 감소하고 복지 지출은 늘어나면서 국가재정은 빠르게 악화된다. 청년세대는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잃고, 자산 축적과 결혼·출산을 더 회피하게 된다. 결국 경제뿐 아니라 인구 구조도 동시에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시나리오를 피하려면 지금 당장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내 삶에 닿는 성장률
성장률 1% 시대는 숫자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다. 작은 기업은 대출이 어렵고, 자영업자는 임대료와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한다. 대기업마저 투자 대신 내부 유보에 집중하면서, 일자리는 줄고 기회는 닫히고 있다. 이 모든 구조가 연결되어 있다. 성장률 둔화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
잠재성장률 1%는 단순한 경제 지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경고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그리고 ‘누가 이 구조를 바꿀 수 있는가?’ 답은 수치가 아니라 구조 속에 있다. 그리고 그 구조를 바꾸는 것은 우리 모두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