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없다 – 초고령사회, 인식과 역할의 전환이 필요하다

숫자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미디어원=이진 기자) 2025년 현재, 한국은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층이 20%를 넘어선 ‘초고령사회’에 공식 진입했다. 이러한 수치는 단순한 인구 통계가 아니라, 사회 구조 전체를 재편해야 한다는 신호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고령층을 ‘소비만 하는 계층’, ‘복지 비용의 부담’으로 바라보며 불편한 시선을 던진다. ‘노인’이라는 말은 과거에는 존경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덧입었다.
그 결과, 숫자는 늘어도 존엄은 줄고 있다.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정책도 제도도 실효를 갖기 어렵다.

 

‘노인’이라는 말이 가진 언어 폭력

‘노인’이라는 단어는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사회의 무의식적 시선이 녹아 있다.
고대 사회에서 노인은 공동체의 지혜와 결정을 책임지는 존재였다. 조선시대 향약에서도 ‘노인회’는 지역사회의 어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노인’은 많은 경우 비하와 동정, 무기력함의 기표로 쓰인다. ‘사오정’, ‘오륙도’ 같은 유행어는 중장년층의 해고와 퇴출을 희화화했고, ‘틀딱’, ‘꼰대’라는 말은 나이든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 방식이 됐다.
이런 언어가 일상에 스며들면서 세대 간 단절과 혐오가 정당화되고 있다.

 

세대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

세대 갈등은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다.
청년 세대는 일자리와 미래의 불확실성에 분노하고, 고령층은 자신이 배제되는 사회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자원 부족이 아니라, 그 자원을 분배하고 설명하는 정치의 실패다.
정치권은 청년을 ‘희망’, 노인을 ‘부담’으로 나누어 표를 관리하고, 언론은 갈등 프레임을 확대 재생산한다.
그 사이에서 실제 문제 해결보다는 상징적 분노가 커지고 있다.

정치가 세대 간 연대를 설계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다음 세대에게 돌아간다.

 

초고령사회, 필요한 것은 퇴장이 아니라 재출발

한국에서 50대는 이미 은퇴자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사람의 수명은 늘어났고, 건강 수명도 70세를 넘겼다. 실제로 60대 후반까지 왕성하게 활동 가능한 시대에, 조기 퇴출은 거대한 낭비다.
선진국은 이를 막기 위해 ‘생애 이모작’을 국가 차원에서 설계한다.
예컨대 핀란드는 55세 이상 재직자에게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고, 독일은 은퇴 후 강사·자문 역할을 장려한다.
한국은 아직도 40대 후반이면 위기감을 느끼고, 50대는 퇴출 대상으로만 여긴다.

재출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길을 열어줘야 가능한 일이다.

한국 사회의 역할 고정 – 왜 노인은 경비만 해야 하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고령층 재취업자는 70% 이상이 단순 노무직에 몰려 있다.
아파트 경비, 공공근로, 환경미화, 주차관리 등은 고령자 일자리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이들이 실제로 하고 싶은 일은 다른 곳에 있다. 농업기술자, 장인, 상담가, 학교 보조강사, 멘토링 등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은 많다.

그러나 정책은 고령층을 단순히 생계 보조 대상으로 보고, 고용 정책은 단순 일자리 제공에 그친다.
일본은 ‘실버멘토링센터’를 통해 퇴직자와 청년 창업가를 연결하고 있고, 덴마크는 ‘시니어 연수단’을 통해 해외 교육 활동도 장려한다.

한국도 이제 고령층을 ‘보조 인력’이 아닌, ‘축적된 자산’으로 볼 시점이다.

 

지금은 노인을 다시 정의할 때

‘노인은 없다’는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노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낡은 시대의 프레임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고령자가 많다는 것은 곧 인류가 성취한 결과이며, 이제는 그 경험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논의해야 할 때다.
존엄은 나이로 잴 수 없다.

존중받는 고령층이 있는 사회는 청년도 안심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이제는 모두가 배워야 할 시간이다.

초고령사회에 필요한 것은,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의 혁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