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우유의 기억: 소사와 주번, 그리고 전쟁 이후 세대

어릴 적 미국 원조 우유와 빵을 먹던 기억은,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에게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학교 소사와 주번, 그리고 전지분유의 맛까지—그 모든 것이 그 시절 한국의 현실이었다.

 ‘원조 우유’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바칩니다

어릴 적, 우연히 본 한 포스팅에서 미국 원조 우유, 빵, 밀가루 이야기가 등장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단어들이 그와 함께 되살아났다.

먼저, ‘소사(小使)’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과거 학교나 관공서, 상점 등에서 자잘한 일을 도맡아 하던 분들을 이렇게 불렀다. 학교에는 대개 ‘관사’가 있었고, 소사 선생님은 가족과 함께 그곳에 살며 학교의 크고 작은 일을 관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중요한 역할이었다.

또 하나는 ‘주번(週番)’이다. 한 주간 학급의 일을 담당하는 학생이었고, 요즘의 ‘당번’ 개념과 유사하다. 주번은 아침에 칠판을 닦고, 점심 시간엔 소사 선생님 댁에서 우유를 받아오는 일도 했다.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자랐지만, 그 시절은 서울보다 부산이 더 활기찼던 때이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서울보다 집값이 높았던 부산. 그런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제 많지 않다.

우리는 베이비붐 세대였고, 한 학급에 80명은 기본이었다. 교실이 모자라 오전반, 오후반으로 수업을 나눴고, 도시락을 싸올 수 없는 학생들도 많았다. 점심 시간이 되면 미국에서 지원받은 원조 빵과 우유가 제공됐다. 빵엔 살짝 발라진 딸기잼이, 우유는 바케스에 담긴 분유를 물에 타 나눠 마시곤 했다.

형편이 괜찮은 편이었던 나는 도시락이 있었지만, 그 빵과 우유가 이상하게도 더 맛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도시락을 친구들과 바꿔 먹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에서 태어나, 외화벌이에 분투하던 청년기를 지나, 이 나라가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봤다.

그리고 오늘,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듯한 현실까지 마주하고 있다니. 과연 누가 이 모든 걸 상상이나 했겠는가.

6 Jun 2025 14:13 滄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