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깊이있게 읽는 영화-아바타


아바타 영화를 본 사람들은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과 3D 입체 화면에 큰 찬사를 보내지만 그 내용은 <포카혼타스>의 우주 버전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포카혼타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백인이 원주민 인디언 처녀와 아름다운 사랑과 중재로 인디언 부족과 신뢰를 쌓아간다는 이야기 얼개를 가지고 있지만 문화와 문명이 만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욕심으로 생기는 폭력과 야만에 대한 것은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습니다.

제임스 카메룬 감독은 아바타라는, 신화와 디지털을 아우르는 제목을 선택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중에서 첨단 테크놀로지로 만든 인간의 비행체, 인간의 주거지, 가공할 인간의 무기는 물론 인상적이지만 , 판도라 행성의 어머니 나무, 정령나무(精靈木)는 메인 컴퓨터의 기능과 다르지 않고 USB와 같은 촉수로 교감하는 것이 컴퓨터의 네트워크의 접속 방법과 아주 흡사합니다. 이러한 진정한 양방향 소통은 마치 인터넷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영화 속의 인간들은 소통이 아닌 감시와 지시, 폭력과 약탈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판도라라는 행성의 이름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화에서 인간의 호기심으로 열어버린 상자에서는 인간의 모든 죄악이 풀려나오고 마지막 희망만 남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판도라 행성은 마지막 남은 희망을 의미하고 인간은 풀려나온 죄악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판도라 상자의 많은 부분이 죄악이라면 진정한 판도라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아바타는 원래 인도 힌두신의 화신으로 악을 무찌르는 대리인을 말한다고 합니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나비족의 DNA로 몸을 합성하고 인간의 의식이 조정하니 인간의 대리인이나 화신으로 보면 간단하겠지만 목적은 사실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아바타나 판도라가 다 동서양의 신화에서 가져온 이름이라면 감독은 틀림없이 신화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했으리라 봅니다. 영화 속에는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듯합니다.
보들레르의 이 시詩를 읽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연은 하나의 궁전, 그곳에 살아있는 기둥들이,
이따금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고,
길가는 사람은 친근한 눈길을 보내는 숲의 전송을 받으며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상징의 숲
밤처럼 광명처럼 끝이 없고
어둠과 빛의 깊은 하나 됨에
저 멀리 뒤섞이는 기인 긴 메아리처럼
냄새와 색과 소리가 서로 노래하네.
-보들레르의 <교감 Correspondance>
영화중에서 발자욱이 닿는 곳마다 어둠에서 빛나는 야광이끼와 식물들과 현란한 색을 띤 동물들, 나비족이 교감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판도라-대칭성-신화

신화는 국가라는 체계를 갖추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해서 발달해왔습니다. 그 사회에서는 인간이 동물에 비해 일방적인 우위에 있거나 인간관계를 초월한 권력 같은 것이 사람들에게 강압적인 힘을 휘두르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구조가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내부에는 풍요로운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 계층의 차가 발생한 곳도 있었지만 그런 사회에서도 인간과 동물 사이의 대칭관계는 엄격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신화를 갖고 있는 세계에서는 인간은 <문화>를 갖고 살아가고 동물들은 <자연>상태 그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문화> 덕택에 인간은 욕망을 절제하고 사회의 합리적인 운행을 위해 규칙을 지키면서, 동물이 모방할 수 없는 억제된 삶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간은 자연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훨씬 절제된 생각과 행동을 한 것은 당연시 됩니다. 근대인들이 <야만인>이나 <미개인>이라고 경멸했던 사람들은 그들 보다 훨씬 품위 있고 우아한 <인간>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일본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중 ‘곰에서 왕으로’에서)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은 자신들을 절제하고 다른 이를 배려하는 <문화>를 가진 종족으로 동, 식물과도 교감하고 존중하지만 우위를 점하지 않는 대칭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인간-비대칭성-문명

이와는 반대로 영화 속의 인간은 <문명>과 <부>와 <국가>라는 체계를 가졌습니다.
프랑스 인류학자인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일본의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의 ‘곰에서 왕으로’에서 두 사람은 <국가><문명><부>는 비대칭성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문화>라는 말속에는 <야만>이나 <미개>라는 개념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문화는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오래된 규범이나 질서를 의미합니다.

티벳의 전통장례의식은 조장鳥葬입니다. 죽은 이의 뼈와 살을 산에서 수천조각으로 나눠 독수리들이 먹기 좋게 뿌려줍니다. 독수리의 먹이가 되어 영혼은 하늘로 날아 자유를 얻고 안식을 얻는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매장이나 화장을 하는 사회에서는 사체를 훼손하는 야만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우리의 장례풍습을 보면 영혼을 하늘로 돌려보내지 않는 기이하고 야만적인 습속이라 생각하고 연민을 느낄지도 모르지요.

영화에서 나비족은 엄연한 질서와 규범이 세분화된 <문화>를 가진 매력적인 종족으로 나옵니다. 인간에게는 약탈의 걸림돌 밖에 되지 않는 나무와 생명을 위협하는 동물들은 제거대상일 뿐이지요. 우리 인간은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오랜 세월 자연을 약탈해왔습니다. 앞으로는 인간이 자연의 약탈과 복수의 대상이 될 겁니다. 판도라에서 추방당하는 인간처럼 자연으로부터 추방되어질지도 모릅니다.

신화를 이야기하던 시대의 사람들은 동물을 야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동물은 자연상태 그대로 살고 있으며 인간이 접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의 비밀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의 주인은 동물이고 진정한 권력자로 인식했습니다. 신화에서 많은 동물이 등장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대칭성 사회>에서는 <권력>이 인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의 탄생으로 대칭성 사회는 깨어집니다. 국가라는 체계 속의 인간은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또 동물의 소유였던 <자연의 힘>의 비밀마저도 수중에 넣으려함으로 대칭성의 균형을 상실한 <문명>으로 바뀌었습니다.

판도라가 가진 <자연의 힘>의 비밀을 수중에 넣으려고 자랑스럽게 우쭐대는 영화 속의 인간 <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가장 <문명화>된 사회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비대칭적 관계가 존재하고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위한 <정의>라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이런 선입관은 <대칭>이 아닌 <대립>을 만들어내고 <대립>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립>은 폭력을 낳습니다. 테러가 발생하고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문명>이 만든 <정의>가 <야만>을 낳은 셈입니다.
부의 분배도 역시 극단적인 <비대칭>입니다. 분배의 불균형에서 생기는 불공평도 여러 종류의 <야만>을 만들고 있습니다.
구제역 때문에 떼죽음 당하는 가축, 동족의 고기와 내장, 뼈를 먹게 만들어 생긴다는 광우병 이런 것들을 예전 예의를 갖춰 사냥하고 죽인 동물의 몸과 내장, 뼈를 정성스럽게 처리하던 <신화가 있는 시대>의 사냥꾼들이 보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바타 영화 속에서도 나비족이 동물을 대하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아바타로 분한 남자 주인공이 판도라의 동물을 대하는 모습에 화를 내는 나비족 여주인공 모습을 기억해 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문화를 자랑하고 문명적인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약탈이 필수적입니다. 약탈의 결과는 자원의 고갈과 생태계의 파괴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거의 백년이 지난 다음의 이야기로 만들어졌지만 자원의 고갈은 더 빨리 도래할 수도 있습니다.
대칭성은 <에콜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명이 가진 <야만성>을 생각해본다면 언젠가는 <대칭적이고 신화적인>상태로 회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김찬욱 교수 : 서양화가이자 시인이며 여행과 문화 칼럼니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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