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화살

평양 출신 월남아였던 아버지의 열세 번째 기일(忌日)은, 봄비가 새초롬이 꼬리를 내리고 미세먼지가 가신 날, 푸르름의 조화를 타고 찾아왔다.

하늘은 제우스의 번개를 피한 아프로디테의 사랑스러운 모습처럼 감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옆에서 양털 구름은 세상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누이 둘이 정성껏 차려온 정갈한 음식 사이에서 다정한 문장들은 지지배배 서성거렸고 멧새 몇 마리 포르르 날자 봉분 위로 부어지던 술잔이 불콰하게 흐느적거렸다.

나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읽고 잠시 어벙했던 모습처럼 헐렁거리고 서서 하늘을 쳐다보다가, 매형이 따라준 음복주 한 잔에 절름거리는 인생의 종아리를 걷었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빈곤이 내 단순하고 게으른 생각의 칼날에 베어져 나갔을까? 견디기 쉽지 않았던 침묵의 나날들이 그리워 나는 부모 합장묘에 절을 올리며 스스로를 미워해야 했다.

거세되기 전까지는 누구나 한 때 풍운아였고 기린아였다. 내 아버지가 그랬고 내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으며 또 내가 그랬다. 비록 오애순에 대한 지고지순한 애정과 믿음의 대명사 양관식은 아니었지만, 사랑도 언제나 문학소년이었다.

가시덤불과 모진 광풍이 호그와트를 덮쳐도 의연한 교장 덤블도어처럼, 살면서 당연히 겪는 간난을 숙명처럼 여기고 산 세대에게 봄은 겁나 먼 율도국이었지만, 자식을 이상향으로 알고 산 아버지에게 봄은 항상 집안에 있는 파랑새였다.

바람이 불었다. 오늘의 바람은 스웨덴의 전설 [아바(ABBA)]가 낳은 안단테풍으로 다가왔다. 일족은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르는 소리로 속삭였고 봉분 속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꼭잡고 엿듣고 계셨다.

그런 사이 심심해진 바람이 일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나갔고 십삼 주기에 한 시간 반 동안 주고 받던 대화도 이제 그만 쉬실 시간이 된 두 분의 시간에 따라 멈췄다. 그사이에 큐피트의 화살이 봉분을 뚫고 누워계신 아버지의 가슴에 맞는 것을 내가 보았던가? 보지 못했던가?

아마 그것은 못난 일족들의 모자란 정성이지만 그래도 웃고 반기실 어머니만 아실 것이다. 그래서인가? 봉분의 흙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광경을 보았다고 우기면 너무 나간 것이겠지? 음탕한 하늘은 시치미를 뗀 채 돌아 앉았다.

박철민
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