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News 손가락 두 마디를 자르고 총을 들었다…남자현의 마지막 투쟁

손가락 두 마디를 자르고 총을 들었다…남자현의 마지막 투쟁

손가락 두 마디를 자르고 피로 독립을 썼던 남자현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 다시 권총을 들었다. 체포와 단식 끝에 그가 남긴 것은 200원 독립축하금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광복을 그는 이미 믿고 있었다. 그 유언은 조선은 반드시 독립한다는 독립운동가의 마지막 확신이었다.

한복을 입은 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 초상화
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 초상.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고 환갑을 넘겨 무토 노부요시 거사를 준비했던 그의 마지막 투쟁을 상징적으로 담았다.

1933년 2월 말, 하얼빈. 허름한 중국인 노파 차림의 여인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늙고 가난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몸에는 무기가 숨겨져 있었다. 목표는 주만주국 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

여인의 이름은 남자현.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남자현은 1933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기념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던 무토를 겨냥해 동지들과 거사를 준비했다. 무기를 마련하고 연락망을 움직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 하얼빈 교외 정양가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걸인 노파로 변장해 이동하다 검문에 걸린 것이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싸움이 여기서 시작됐다.

손가락을 잘라 쓴 네 글자

몇 달 전인 1932년, 국제연맹의 리튼조사단이 만주사변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하얼빈에 왔다. 남자현은 이것을 조선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극단적이었다.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자신의 피로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썼다. 흰 수건에 쓴 네 글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 리튼조사단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원(願)’은 바란다는 뜻이다. 한국의 독립을 원한다. 말로 하면 짧은 한 문장이지만, 남자현은 그 문장을 자기 피로 썼다. 잘려나간 손가락은 다시 붙지 않았다.

왜 거기까지 갔을까

독립을 주장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선언서를 쓸 수도, 편지를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몸의 일부를 잘랐다. 지금 시선으로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그때 그가 서 있던 자리부터 돌아봐야 한다.

조선이 강제로 병합된 지 20년이 넘었고, 3·1운동도 이미 십여 년 전 일이었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이듬해 만주국을 세웠다. 남자현이 활동하던 만주의 독립운동 공간은 빠르게 좁아지고 있었다. 독립이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멀어져 보이던 시기였다.

그런 때에 국제연맹 조사단이 왔다. 남자현에게는 세계를 향해 조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거의 마지막으로 남은 기회였을 것이다. 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몸으로 증명하려 했다.

피로 쓴 호소 다음엔 총이 있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움직임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이듬해 남자현은 직접 행동에 나섰다. 1933년 초, 동지들과 함께 무토 노부요시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다. 3월 1일 건국기념일을 거사일로 잡고 무기를 구하고 동지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준비를 진행했다.

이번에도 그는 직접 움직였다. 남에게 시킨 일이 아니었다. 여성 계몽운동을 할 때도, 옥에 갇힌 동지들을 돌볼 때도, 김동삼을 구하려 나섰을 때도 늘 그랬다. 그러니 총을 들어야 할 순간이 왔을 때도, 역시 자신이 갔다. 남자현은 독립운동의 곁에 머문 사람이 아니었다. 그 한복판으로, 매번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었다.

거사는 실패했다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혹독한 취조와 고문이 이어졌다. 남자현은 약 6개월간 옥고와 고문을 겪었고, 끝내 옥중에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상태가 위중해지자 일제는 그를 보석으로 풀어줬다.

하지만 이미 몸은 무너져 있었다. 석방은 자유가 아니라, 죽음을 감옥 밖으로 옮긴 것에 가까웠다. 남자현은 하얼빈의 병원과 여관을 전전하며,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독립되는 날 이 돈을 바쳐라”

마지막 순간에도 남자현이 생각한 건 독립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으며, 조선이 독립하면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라고 유언했다. 조선은 독립한다. 자신은 그날을 보지 못하더라도, 후손은 볼 거라고 믿었다.

더 놀라운 대목이 있다. 아들이 살아서 독립을 보지 못한다면, 그 아들의 자손에게 같은 유언을 전해서라도 그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게 하라는 것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10년 뒤일지 50년 뒤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남자현에게 독립은 ‘될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오는 날이었다.

“독립은 정신에 있다”

남자현의 마지막 말로 전해지는 문장이 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는 데 달린 게 아니라 정신에 있으며, 독립 역시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의 말이었다. 그는 1933년 8월 22일, 하얼빈에서 숨을 거뒀다. 시신은 하얼빈에 묻혔지만 이후 묘지는 사라졌고, 유해의 행방도 알 수 없게 됐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남자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봉창, 신채호와 같은 등급이었고,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가장 높은 서훈이었다. 2019년 유관순 열사가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으로 승격되면서 지금은 순위가 뒤바뀌었지만, 손가락을 자르고 총을 들었다가 옥사한 삶 앞에서 등급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굳이 따진다면, 남자현의 서훈은 지금도 낮게 매겨진 편이라고 해야 옳다. 그의 이름 앞에는 오랫동안 ‘여자 안중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이제 그 표현은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안중근이 자신의 이름으로 기억되듯, 남자현 역시 자신의 이름만으로 충분하다.

남편을 의병으로 잃고 아들을 키웠다. 마흔을 넘겨 만주로 가 독립운동가들을 돌보고 구출하려 했다. 손가락을 잘라 피로 독립을 썼고, 환갑을 넘겨 총을 들었다. 잡히고, 고문당하고, 굶었다. 그리고 죽으면서 돈을 내놓으며 말했다. 독립되는 날 바치라고.

남자현이 대단한 건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계획했던 거사는 실패했고,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으며, 무덤마저 사라졌다. 그런데도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12년 뒤 그 믿음은 현실이 됐다. 남자현의 후손들은 독립된 나라에서 살아가게 됐다. 그토록 큰 희생을 한 사람의 후손은, 그 공훈을 어떻게 짊어지고 살아야 할까.

남자현 지사 순국 후 촬영된 가족사진 속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 가족
남자현 지사 순국 후 촬영된 가족사진. 1번은 아들 김성삼, 2번은 친손자 김시련이며 김시련 옆에는 부인이자 필자의 고모가 있다. 남자현지사는 이미 서거, 이 사진에 없다.

남자현의 친손자였던 한 교육자는 뜻밖의 답을 남겼다. 그는 할머니의 공을 크게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는 무엇을 과시하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다음 이야기는 남자현이 아니라, 그 손자에 관한 이야기다.

[남자현③에서 계속]
남자현은 공훈을 남겼고, 손자 김시련은 독립운동가 후손의 참 모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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