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Story 칼럼 남편은 의병으로 죽었다…23년 뒤 남자현은 만주로 갔다

남편은 의병으로 죽었다…23년 뒤 남자현은 만주로 갔다

아버지 유품 속 잡지 한 권에서 다시 만난 이름, 남자현. 남편을 의병으로 잃은 뒤 유복자를 키우며 23년을 견딘 한 여성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독립군의 어머니가 되었는지 따라간다. 총을 들기 전 긴 시간과 마지막 거사 직전의 결의를 함께 되짚는다. 그 이유를 묻는다.

남자현 열사의 초상을 16대9 비율로 보정한 이미지
남자현 열사. 오래된 초상의 질감과 분위기를 살려 16대9 비율로 보정했다.

역사를 다시 묻다 | 남자현①

아버지는 말씀이 적으셨다. 그 시절 어른들이 대개 그러했듯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고,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도 않으셨다. 그래도 얼굴에서는 좀처럼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늘 무언가를 읽고 계셨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신문을 읽거나 책을 펼쳐놓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다 오래된 잡지 부록 한 권을 발견했다. 2010년 9월 『월간중앙』이 광복 65주년을 맞아 펴낸 특집이었다. 표지에는 한 여인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남자현. 그 아래에는 ‘여자 안중근’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왜 아버지는 이 잡지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계셨을까.

페이지를 넘겼다. 처음에는 오래된 독립운동가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조금씩 달라졌다.

영웅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영웅 신화는 다른 어떤 이야기와도 달랐다.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워야 했던 한 여자가, 긴 세월을 건너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게 되는 이야기였다.

스물네 살,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현은 1872년에 태어나 열아홉 살에 영양 석보면의 김영주와 혼인했다. 그 시대 수많은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러나 1896년 남편 김영주는 김도현 의진에 참여해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남자현에게는 유복자가 남았다.

스물네 살의 젊은 과부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시부모를 봉양하고 아들을 길러야 했다. 국가보훈부 기록에는 그가 양잠을 하고 직접 명주를 짜 팔며 가계를 꾸렸다고 적혀 있다.

그 뒤로 23년이 흘렀다. 그 23년을 우리는 몇 줄의 연보로 건너뛴다. 그러나 한 인간에게 23년은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이다. 아이를 키웠을 것이다.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봄이면 누에를 치고 겨울이면 추위를 견뎠을 것이다. 남편이 죽었다고 해서 매일 독립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로 그래서 남자현의 다음 선택이 더 놀랍다.

2010년 9월 월간중앙 광복 65주년 남자현 특집 표지
아버지의 유품에서 발견한 2010년 9월 『월간중앙』 광복 65주년 특집. 표지에는 남자현 열사가 ‘여자 안중근’이라는 제목과 함께 실렸다.

1919년, 그는 집을 떠났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남자현은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그해 그는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요령성 통화현으로 가 서로군정서에 참여했다. 국가보훈부는 이후 그가 독립군을 지원하고 여성 계몽 활동에 나섰으며 여러 지역에서 교육과 조직 활동을 펼쳤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남자현이라는 사람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스무 살의 청년이 아니었다. 남편의 죽음이 무엇인지 알았고, 자식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도 알았다. 세상이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이미 충분히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국경을 넘었다. 용기를 두려움을 모르는 상태라고 생각한다면 남자현을 잘못 읽게 된다. 그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 만한 나이에 움직였다.

남자현의 만주 독립운동 활동지 이동 경로 지도
남자현의 주요 활동지 이동 경로. 지도에는 하얼빈·길림·통화·환인 등 만주 일대 활동지가 표시돼 있다.

밥을 짓던 손과 총을 잡는 손

만주에서 남자현이 처음부터 총을 들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독립운동가들을 돌보고, 여성들을 가르치고, 조직을 돕고, 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다녔다.

1927년 길림에서 안창호·김동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관헌에 체포됐을 때 그는 석방될 때까지 옥바라지와 구명 활동을 했다. 1931년 김동삼이 일제에 붙잡혔을 때에는 친척으로 위장해 면회하고 국내 호송 과정에서 구출할 계획까지 세웠다.

남자현에게 돌봄과 투쟁은 반대말이 아니었다. 부상자를 간호하는 것도 독립운동이었고, 감옥에 갇힌 동지를 살리는 것도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그보다 더 먼 곳까지 갔다.

1925년에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겨냥한 계획에 참여해 국내로 잠입했다. 거사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이 무렵부터 남자현의 활동은 지원과 계몽의 영역을 넘어 직접적인 무장투쟁으로 향하고 있었다. 세월이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남자현은 이상하게도 반대였다. 나이가 들수록 더 위험한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어쩌면 그를 이미 만났다

오늘의 대중에게 남자현은 낯선 이름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수백만 명이 본 영화 속에 있다.

2015년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독립기념관은 이 인물이 남자현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영화의 저격수 설정과 남자현의 실제 삶은 다르지만, 남성 중심으로 기억돼온 무장독립운동사 속 여성 투사의 존재를 대중에게 되살린 인물이었다.

영화에서는 안옥윤이 총을 든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실제 남자현의 삶은 그보다 길고 더 복잡하다. 총을 들기 전에 남편을 잃었다. 아들을 키웠다. 시부모를 모셨다. 수십 년을 견뎠다. 감옥을 찾아다녔다. 동지를 살리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난 뒤에야 총을 들었다.

영웅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번의 거대한 결단보다는 작은 선택을 수십 년 동안 되풀이한 끝에 어느 순간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가 있는 사람. 남자현이 그랬다.

영화 암살의 안옥윤을 연상시키는 여성 독립투사 이미지
2015년 영화 의 안옥윤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남자현의 삶에서 모티브를 얻은 캐릭터로 알려졌다. 사진: 영화 암살의 한 장면 

예순을 바라보던 여인이 자신의 몸에 칼을 댔다

1932년 만주는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만주사변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왔다. 남자현은 이것을 조선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릴 기회로 보았다. 그리고 기이할 만큼 처절한 방법을 택했다.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랐다. 흘러나온 피로 독립을 염원하는 혈서를 썼다.

말로만 전해서는 세계가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종이에 먹으로 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마음까지 우리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남았다. 그는 독립이라는 말을 자기 몸에 새겼다.

손가락은 다시 자라지 않는다. 한번 잘라내면 평생 그 흔적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남자현에게는 그 뒤에 살아갈 평생도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 해인 1933년 2월, 그는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혈서가 아니었다. 몸에 권총과 탄환, 폭탄을 숨겼다. 목표는 만주국 주재 일본대사이자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였다.

나는 여기까지 읽다가 책을 잠시 덮었다. 아버지가 왜 이 잡지를 가지고 계셨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람은 죽는다. 기억도 흐려진다. 그러나 어떤 삶은 오래 남아서 뒤에 태어난 사람에게 묻는다.

너라면 어디까지 갈 수 있겠느냐고.

1933년 2월 27일. 남자현은 거지로 변장하고 하얼빈을 떠나려 했다. 몸에는 총이 있었다. 그리고 왼손에는 두 마디가 사라진 무명지가 남아 있었다. 그의 마지막 싸움이 시작됐다.

[남자현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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