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청풍호반을 비추는 선율과 이야기
정치적 수단으로 비춰지는 지역축제
방한하는 외국인들이야 서울이나 제주도가 대한민국 최고의 관광지라고 생각하겠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뭐니 뭐니 해도 강원도가 최고의 휴양지다. 깊은 계곡과 푸른 산세, 사파이어를 떠올리게 하는 짙은 동해바다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여름이면 한번은 찾아봐야 하는 대표 여행지나 다름없다.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강원도의 멋스러움을 그대로 느끼면서 충북의 맛스러움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장소가 눈앞에 나타난다. 청풍 호를 낀 푸르른 도시. 바로 제천이다.
무덥고 습기도 높은 오후의 그림자 속에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나 한방엑스포를 적극 홍보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침 국제음악영화제가 전날 개막해서 인지 제천시내의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영화제 출품작을 상영하는 시내 TTC 상영관 주변에는 벌써 많은 인파가 몰려있다. 올해로 6회째를 맞는 국제음악영화제가 제대로 입소문을 탔나보다.
10분여 차를 타고 시외로 나서면 금세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어여쁜 펜션이 싱그러운 나무사이로 제 멋을 뽐낸다. 강원도가 떠오르는 굽이굽이 산 중턱을 누비다보면 어느새 청풍호반에 다다른다.
반짝이는 청풍호반을 바라보며 음악과 영화에 심취할 수 있는 곳이라니.
그 누가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니라할 수 있겠는가
#‘물 만난 영화, 바람난 음악’
제 6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지난 12일부터 17일까지 제천시 일원에서 열렸다. 한여름 청풍호반의 시원한 바람과 아름다운 경치를 무대로 현장에서 연주되는 환상적인 공연과 각국의 다양한 음악영화가 펼쳐지는 일은 꿈이 아니다. 매년 제천에서 열리는 국제음악영화제에서 마주칠 수 있는 풍경이다.
영화제 기간 동안 다양한 레퍼토리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지만 그 중 최고를 꼽으라면 시네마콘서트다. ‘무성영화와 음악의 만남’을 주제로 지난 2006년에 처음 시작된 시네마콘서트는 무성영화에 현장 연주를 가미해 관객이 어디에서도 느껴볼 수 없었던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올해는 프랑스문화원의 협조로 무성고전영화의 명작 제너럴과 시네믹스 분야의 선구자 라디오멘탈의 연주가 하모니를 이뤘다.
1920년대 제작된 흑백 무성영화라고 해서 고루하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편견은 어느새 북군에게 빼앗긴 기차 제너럴 호를 찾아오려는 기관사 키튼의 무표정한 슬랩스틱 연기에 웃음과 감탄으로 바뀐다. 축제기간 내내 떨어지는 빗줄기에도 수많은 관객들은 우비를 꿰차 입고 어느새 영화에 몰두했다. 게다가 대사 대신 연주되는 라디오멘탈의 연주는 배우의 심리를 적절히 묘사하며, 관객들의 기분을 주도한다.
제천 시내 TCC상영관에서는 영화제 기간 내내 온가족이 함께 즐기며 볼 수 있는 영화를 상영한다. 장편 애니메이션 ‘원숭이 크리쉬와 고양이 트리쉬’ 는 원숭이와 고양이, 당나귀 세 음악가의 인도 탐험을 통해 인도 각 지역의 전설과 민속음악을 소개했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는 관객속의 아이들은 금세 영상 속 동물들과 친해지고 신나는 인도음악에 도리도리 춤을 춘다.
이제 메인프로그램이다. 원썸머나잇이라는 주제로 호수와 산으로 둘러싸인 청풍호반 야외무대에서 영화와 음악공연을 함께 즐기는 이 프로그램은 개막일과 폐막일을 제외한 4일 동안 한여름 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열린다.
기자가 찾은 13일 금요일 밤에는 지난 40여 년간 한국 포크음악계를 이끌어온 양희은 씨와 대중음악계에 큰 이슈가 됐던 장기하와 얼굴들이 출현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양희은씨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나 ‘상록수’와 같은 자신의 히트곡을 열창했고,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부르던 관객들은 어느새 한마음으로 청풍의 아름다움 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오감을 만족하는 웰빙 여행의 참맛!
건강한 인생을 의미하는 ‘웰빙’은 어느 관광지에서나 꼽는 최적의 수식어다. 충북 제천시는 그 중에서도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웰빙여행의 최적지다.
우선 나지막한 야산과 드넓은 청풍호반은 두 눈을 만족시킨다. 다채로운 수목의 색감과 충북 푸른 하늘을 닮은 청풍호반의 탁 트인 경관은 한 여름 무더위에도 뼛속깊이 시리다. 호강하는 시각적 풍요로움은 감미로운 음악영화로 채워진다.
두 귀는 더 즐겁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물소리, 현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기면 어느새 청풍 호에 몸을 던지고픈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후각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가 풍겨온다. 인체에 가장 예민한 감각이라는 후각은 어느새 고소한 향은 잊고, 얼큰하고 향긋한 내음도 잡아들인다. 제천시가 청풍호반을 중심으로 여러 시설을 확충하면서 맛집도 다양해졌다. 맛잉어라 불리는 쏘가리매운탕에서부터 도톰하고 기름진 떡갈비, 갓 뜯어 지은 산나물 비빔밥까지 말 그대로 입이 즐거운 청풍호반이다.
적당히 배를 채우면 이제 청풍호반 인근을 둘러볼 차례다. 두 다리로 청풍 호를 누비며, 온 몸으로 바람과 푸른 잎을 느끼고, 두 손을 청풍 호에 담가볼 수 있는 기회다. 본격적인 호수 풍광이 펼쳐지기에 앞서 거대한 기암괴석 군락이 눈에 띈다. 처음에는 영화세트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치 독특하고 거대한 외형이다. 시멘트 원료를 채취하다 우연히 발견됐다는 금월봉이다. 산 위가 아닌 너른 평지 위에 자리 잡은 모습이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강원도를 떠올리게 하는 굽이굽이 산길을 되풀이하다보면 길은 어느새 활처럼 휘어지는 구릉이 나타나고 운전을 위해 바로 앞을 주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곁눈으로 주변을 살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조선시대까지 수운의 요충지였던 청풍면 일대에는 당연히 문화유적이 가득하다. 충주댐 건설로 이 일대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5개 면 61개 마을의 문화재를 옮겨 청풍문화재 단지가 조성됐다. 고려시대 청풍 관아의 연회 장소였던 한벽루, 금수산의 능강계곡과 청풍호가 맞닿은 지점에 자리한 능강 솟대문화공간, 여염집만한 정방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
이곳을 모두 지나 다시 호반도로를 달리면 우리나라 아름다운 다리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꼽히는 옥순대교가 보인다. 보면 볼수록 감칠맛 나는 풍광이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존폐 논란 그 이후
지난 6?2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최명현 제천 시장은 “음악영화제 존폐여부를 여론조사로 결정하겠다”고 밝히며 ‘영화제 존폐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충분히 자리를 잡은 부산국제영화제나 전주국제영화제와 큰 차별성을 자랑하며 영화와 음악이란 장르를 특화시킨 제천영화제가 일부 정치적 견해 때문에 존폐논란에 휩싸인 것은 분명 반길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영화제를 주관하는 제천시는 영화제의 당사자라고 보기 힘들다. 영화제 예산 14억 원 중 제천시는 겨우 4억 원만 낸다. 중앙정부와 충북도가 총 5억 원, 그리고 입장권 수입과 스폰서로 행사가 집행되기 때문에 집행부가 제천시보다 더 돈을 끌어오는 셈이다.
올해 여섯 번째 행사를 치른 제천영화제는 영화와 음악이라는 독특한 콘셉트 그리고 휴양지 영화제라는 슬로건으로 비교적 일찍 자릴 잡았다. 지역 정치인들의 파워게임이나 정치적 생색내기에 흠집 잡힐 행사가 아니라는 의미다.
좋은 행사는 관객에게 어필하고 관객으로부터 평가받는다. 어느 한두 명에 의해 영화제가 기획되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땀 흘리는 사람들에 의해 제천시와 국제음악영화제는 하나가 됐다. 어째서 자신들이 보듬어 놓은 좋은 가치를 구태여 내치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