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東嶺 소똥령, 인연이란 참 묘하다. 사람들과의 인연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연과의 만남은 더 더욱 그렇다.
몇 해 전 늦가을, 강원도 고성의 진부령 고갯길을 넘다가 우연찮게 만난 곳도 꼭 그러했다.
소똥령(소동령, 小東嶺). 이름만 들어도 진한 고향의 향기와 정감이 넘치는 아담한 산골마을과 옛길이 그것이다. 옛날 국도 1번지로 불리며 강원도 고성 땅 사람들이 인제 원통 장으로 소를 팔기 위해 넘거나, 청운의 꿈을 품은 선비들이 걷던 길.지금은 문명의 도로에 밀려 태곳적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채 꼭꼭 숨어있는 길 말이다.
누군들 이런 곳을 만났다면 가슴이 울리고 묘한 감정(?)이 샘솟는 인연이라 느끼지 않겠는가.
하지만 단 몇 분만의 짜릿한 인연은 가슴 한 구석 짝사랑으로만 남은 채 그렇게 소똥령은 잊혀졌다.
인연을 끈을 다시 이어준 것은 캠핑이었다. 캠핑카페를 운영하는 캠퍼(캠핑을 하는 사람)들이 소똥령 캠핑여행을 제안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짝사랑 여인을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수면아래 있던 감정의 물결이 한 순간에 일렁인다.
봄날, 짝사랑을 찾아 6명의 캠퍼가 여행길에 올랐다. 봄을 시샘하는 비바람과 짙은 안개가 우리를 가로 막고 섰다. 인연을 찾아 나선 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똥령은 그렇게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진부령 길 정상에 올라서자 날씨는 더욱 더 거칠어졌다. 정상에서 구비 구비 5분여 달리자 안개속에 잠긴 소똥령마을이 나타났다.
늦가을 떨어지는 단풍 속에 잠겨있던 소똥령은 온데 간데 없고 수줍은 새색시마냥 초록빛깔 옷을 갈아입은 소똥령이 그 곳에 있었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녹음으로 분단장하고 빗물을 눈물 삼아 우리를 반겼다.
캠퍼들은 능숙한 솜씨로 마을입구 소나무 숲에 아담한 보금자리(텐트)를 지었다. 숲과 계곡 그리고 야생화가 지천으로 깔린 소똥령에서 하룻밤, 그 풋풋한 만리장성 쌓기가 시작됐다.
저녁을 먹고 하나 둘 모닥불 주변으로 모여 앉았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풀벌레와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이 정겹다. 모닥불을 벗 삼아 도란도란 이야기 꽃은 추억이 된다. 조잘 되며 흘러가는 계곡물 소리도 오늘은 나와 함께 밤새 이야기를 나누자고 속삭이는 듯 하다. 소똥령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떴다. 비바람을 이겨낸 들꽃의 미소가 먼저 인사를 한다. 갓 싹을 틔운 들꽃위로 초롱초롱 빗방울이 맺혔다.
텐트 안이 시끌시끌하다. 이른 아침을 챙겨먹은 캠우(캠핑을 함께하는 동료)들이 소똥령 트레킹에 나서는 소리다.
소똥령에선 할 게 많다. 진부령을 타고 흘러내리는 북천계곡에서 플라이낚시를 즐겨도 되고, 마을에서 운영하는 체험활동도 좋다. 하지만 자연 그대로를 간직한 소똥령 옛길에 빠져보는 것만큼은 빼놓을 수 없다.
소똥령 입구에서 정상을 거쳐 마을로 내려서는 길을 택했다. 북천계곡 구름다리를 지나자 안개비를 타고 코끝을 전해오는 숲 내음이 촉촉하고 싱그럽다. 물기를 듬뿍 머금은 안개속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소똥령은 만들어진 긴 시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과거 길에 오르는 선비나 물건을 사고 팔러 다니는 장사치들이 힘겹게 넘던 고갯길이다.
이름의 유래도 재미있는 설이 많다. 소를 팔기 위해 소똥령을 넘다가 소가 똥을 하도 많이 누어 소똥령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는 것. 또 오랜 세월 사람들이 소똥령을 넘다 보니 자연적으로 길이 패여 생긴 소똥모양의 봉우리를 두고 생겼다 등이다. 어떤 연유가 되었던 소똥령이라는 이름에서 풍겨나는 포근함은 정겹기만 하다.
10여분 오르자 숲은 고요하다. 초록빛 새 옷으로 갈아입고 비를 막아낸 나뭇잎들은 촉촉하다. 봄날 새 생명을 뿜어내는 숲 속은 태곳적 적막감에 깊숙이 잠겨있다.
"와~여기 보세요. 금낭화예요" 고요한 숲이 한 순간 떠들썩하다. 길섶에 금낭화가 활짝 피어 초록에 점점이 분홍빛 물감을 덧칠하고 있다.
이끼 낀 개울에선 숲 속의 새 생명을 깨우듯 맑고 청량한 기운을 쏟아내고 있다.
30여분을 올라가니 한 무더기의 흙 무덤이 눈 앞에 나타난다. 제1소똥이다. 봉우리가 길가에 봉긋하게 자리 잡고 앉아 지나는 나그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小東嶺 짝사랑 품에 안기다
정상으로 갈수록 숲은 더욱 더 깊어지며 울창하다. 고갯길은 대낮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우거져 짙은 안개를 뿜어내고 있다.
쉬엄쉬엄 산길을 따라 1시간 30여분을 넘겨 소똥령(제1봉)정상에 섰다. 빼곡히 들어선 안개나무들 사이로 간이의자 하나가 힘들게 올라온 길손을 반겼다.
옛날 지친 나그네의 발길을 잡던 주막의 흔적은 없지만 나무의자 하나만으로도 그 당시 나그네들의 편안함을 오롯이 느껴볼 수 있다. 이곳에서 길이 두 갈래로 이어진다. 하나는 원통으로 가는 소똥령 길이고 다른 한쪽은 소똥령 마을로 가는 길이다.
트레킹은 여기까지 만으로도 족하다. 마을로 내려서는 길, 걸음을 멈추고 아쉬움에 뒤를 돌아 본다. ‘雨歇長堤草色多/送君南浦動悲歌(우헐장제초색다/송군남포동비가)’라 노래한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소똥령도 이 비 그치고 나면 풀빛은 무성해오고, 고갯길은 짙푸른 초록 옷으로 색칠을 하겠지.
그리고 내 가슴속에는 소중한 인연이 만들어준 추억이 살포시 자리를 잡고 앉겠지.
가는 길
서울에서는 경춘고속도로를 타고 동홍천으로 나와 인제 방면으로 간다. 원통을 지나 진부령 길로 가다가 정상에서 고성방향으로 한 5분여 내려가면 오른쪽에 소똥령표지판이 보인다. 마을은 5분 정도 더 내려간다. 국도는 팔당대교를 지나 44번 국도를 이용해 양평, 홍천, 인제를 지나 진부령길을 탄다.
체험
농촌전통테마마을이다. 산나물과 송이 캐기, 소달구지 타기, 묵쑤기, 전통주 담그기, 물고기 잡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계절별로 있다.
캠핑은 여름만 운영되지만 문의를 하면 어느 계절에도 숲 속 캠핑을 즐길 수 있다. 민박집들도 여러 채 있어 숙박걱정은 없다. (http://sottong.go2vil.org)
볼거리
소똥령에서 20여분 거리에 최북단 사찰인 건봉사가 있다. 또 전통마을인 왕곡마을을 비롯해 청간정, 화진포, 대진항, 통일전망대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글 사진 @ 사이버 강원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