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머무르면 마음이 산이 된다는 구절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워낙 오래된 이야기라서 지금은 어떤 책인지도 가물가물하고, 그 책을 읽었던 시점이 산을 오르는 일을 싫어하던 어렸을 적이어서 그런가 보다 하기만 했었던 시절이다.
희안하게도 마음이 산이 된다라는 구절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지는 못하지만, 산이라고 하는 개념은 어린 시절 나에게는 너무도 크고 싱그러우며 웅대했다. 그 시절부터.
이제 산을 오르며 마음이 산이 되는 기분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곤 한다. 세상사에 찌들어 갈곳없이 피곤할 즈음이면 가까운 관악산을 쳐다보기만 해도 청아해지는 기분이 든다.
# 식물과 동물, 그리고 자연
병풍처럼 둘러싼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 중 하나인 두로봉(1,422m)은 평창군·홍천군·강릉시 3개 시·군을 품고 백두대간의 지맥을 이루며 연곡천과 홍천강의 발원을 이룬다.
입구 부근부터 두터운 낙엽으로 몸을 감싼 나무 터널이 일행을 안내한다. 융단처럼 푹신한 잡초는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벌써부터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싸움에 돌입했다.
오대산의 표면을 덮고 있는 이름 모를 한아름 나무들은 어쩐지 두꺼운 털옷처럼 오대산을 추위로부터 막아서고 있는 듯 하다. 이번 구간의 핵심인 오대산은 그야말로 트래킹의 적지다. 끊임없이 이어지고 변화하는 시각의 충만함은 눈을 즐겁게 하고 걸음걸이를 가뿐하게 해준다. 한마디로 수려한 경관의 향연이나 다름없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산길 여기저기를 막기 전 찾았던 오대산의 골짜기와 능선 오솔길에서 받았던 은근하고도 깊은 감동은 여전하다. 바위산인 설악산이 주는 감동이 다소 호들갑스럽다면, 흙산인 오대산이 주는 감동은 묵직하다.
두로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의 울창한 천연 활엽수림은 가쁜 숨결 속에서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눈을 돌려 보니 천년을 살아 숨쉰다는 주목 군락지였다. 겨울을 앞둔 대목에도 어찌나 풍요로운지 흩날리는 낙엽 또한 일품이다.
주목 군락지를 지나 두로봉 정상에서 신선들의 길목인 신선목이를 지나고, 차돌백이(1,200m)에 이르면 하얀 차돌이 봉우리를 이룬다. 여기까지 오르면 오대산을 지리산이나 금강산, 설악산의 뒤를 잇는 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심각하게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일반적인 돌산이 아닌 흙산이 주는 매력에 깊이 빠지고 마는 것이다. 사방팔방으로 휘어쳐 감기거나, 우뚝 제자리를 지키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은 오대산을 산이 아닌 자연 그대로로 보여지게 만든다.
오대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산을 넘어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나 진배없다.
# 버라이어티한 산세의 변모
비로봉,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이 둘러싼 모습이 연꽃을 연상시켜 오대산이라 한다지만, 겨울을 눈 앞에 둔 오대산은 매끈한 여인의 하체를 닮았다고 일행중 풍류 꽤나 아는 녀석이 흘린다.
두로봉 정상에서 바라본 오대산의 모습은 과히 찬탄이 흘러나온다. 여름엔 여름대로, 가을엔 가을대로 또 겨울엔 겨울을 품에 안은 산세의 신묘한 재주는 오르고 올라도,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수 천만년의 역사가 조각한 천연의 작품을 뒤로하고 가는 동대산 길은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진다. 3시간여를 쉼없이 걷다보면 지루함을 느낄 법도 하지만 오대산은 그러한 지루함을 잠시나마 허락하지 않는다. 이내 고개를 들어 보면 거제수 군락지가 나타났다.
황갈색으로 윤기가 나는 나무 줄기를 가진 거제수는 참나무와도 비슷하게 생겼다. 360도 한바퀴를 돌아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거제수 군락지에서 잠시 쉬어 감직하다.
아쉬움을 남겨두고 발길을 재촉해 동대산(1,433m) 정상에 올라 오대산 산자락을 발아래로 굽어보이는 진고개를 향했다. 내리막길이 끝나고 최종 목적지인 진고개가 보였고 뒤편의 몇장 남지 않는 낙엽을 잔망스럽게 흔드는 나무들이 떠나는 길손을 배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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