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늦가을 어느 첫 새벽이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태산 산골짜기에서 화전민 일가족이 길을 떠나고 있었다. 힘깨나 쓸 것 같은 사내의 지게에는 알강냉이며 콩과 팥, 좁쌀 자루 몇 포대가 실려 있었다.
사내가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산골짜기 아래를 향해 오솔길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사내의 아내가 낡은 이부자리며 옷가지들을 단단히 옭아맨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는 두 돌 남짓해 보이는 사내아이가 포대기 속에 업혀 있었다. 여남은 살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와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도 멜빵을 한 채 등짝에 무언가를 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모를 따라 걸었다.
늦가을 찬바람이 텅 빈 화전민 너와집을 훑고 와 골짜기 아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일가족을 배웅했다.
일가족은 내린천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걷다 쉬다 하면서 해가 중천을 지날 무렵 현리에 도착했다. 소년의 아버지가 현리 장터 곡물상으로 가서 지게에 지고 온 곡식들을 돈으로 바꾸었다.
이들은 내린천과 소양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여러 날을 걷다 쉬다 하면서 어느 이른 아침 춘천에 도착했다. 그러잖아도 남루한 화전민 일가족이 지치고 고단하기까지 한 행색으로 춘천역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지난여름 개통되고 이제 막 운행을 시작한 경춘선 종착역 춘천역에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 이 표를 끊고 개찰구 검표를 거쳐 우르르 플랫폼으로 나가고 있었다.
소년은 멜빵에 봇짐을 진 채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들이 방태산 산골짜기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현리 닷새장에 나가 보던 번잡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잡함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에 소년의 아버지가 기차표를 끊어 와 식구들을 개찰구 통로로 몰았다.
개찰구 검표원 옆에 섰던 순사가 남루한 행색의 일가족을 멈춰 세웠다. 순사는 소년의 아버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소년은 순사의 질문에 답하는 아버지 입에서 나온 ‘인천’이라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소년은 인천이라는 말에 적이 마음이 놓였다. 처음 듣는 동네 이름이지만, 그곳에는 방태산 산골짜기 화전민 아들의 일상과는 다른 나날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시커먼 증기기관차가 씩씩거리면서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그 뒤에는 객차 몇 량이 줄지어 달려 있었다. 증기기관차를 처음 본 소년은 두려움보다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연신 뿜어 나오는 희부연 연기를 바라보았다.
기차가 멈추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기차간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등이 떠밀려 기차에 오르기 전까지 난생처음 타보는 이 기차가 데려갈 자신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그러나 방태산 산골짜기 예닐곱 살짜리 화전민 아들의 상상력은 방태산이며 오대산을 힘겹게 넘어가던 하얀 구름의 꿈일 뿐이었다. 그냥 막연히 산골짜기의 생활을 벗어나 보고 싶다거나, 아니 그것보다는 산토끼와 멧새를 더 많이 잡아 겨울이 끝나기도 전부터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먹어야 했던 송기(소나무 속껍질)를 안 먹어도 되는 기대감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춘천이란 도시에 들어설 때부터 자신에게도 뭔지 모를 낯선 꿈이 움트고, 기관차가 멈추기를 기다려 기차간으로 첫발을 올려놓는 순간에는 설렘으로 요동치는 가슴이 느껴졌다.
아침 여덟 시에 춘천을 출발한 기차가 점심때가 지나 서울 종착역인 성동역에 도착했다. 일가족은 청량리 거리로 나와 전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 인근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인천행 기차에 올랐다.
일가족이 부평역에 내린 것은 방태산 골짜기를 떠난 지 이십여 일 만이었다. 부평역에는 인천 우편국에서 일하는 소년의 외삼촌이 나와 있었다.
이들은 경인선 철길 남쪽 야산 아래 거처를 마련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외삼촌의 소개로 주안염전 삯꾼 염부로 일을 시작했다.
일본인 주인은 다른 삯꾼들보다 갑절로 일을 하고도 거뜬한 소년의 아버지에게 마음이 끌렸다. 일을 시작한 지 단 며칠 만에 소년의 아버지는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다. 그렇게 소년네 가족은 조금씩 인천 십정동에서의 생활 기반이 잡혀 나갔다.
소년은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가 염전으로 출근할 때면 함께 따라 나섰다. 삯꾼들 잔심부름을 해주면 군것질거리를 주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거스름돈으로 남겨오는 동전 몇 닢씩을 남겨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때때로 일본인 사장이 주는 용돈은 동전 수준을 넘어 지전 두세 장씩이었다. 그럴 때마다 소년은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하고 소리쳤다.
그렇게 십정동으로 이주한 지 일 년 여가 흘러 소년이 여덟 살 무렵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염전에서 돌아오자 집에 낯선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아버지가 손님과 반갑게 인사했다. 양평에 사는 먼 친척이라고 했다.
친척 어른은 이틀 밤을 자고 사흘째 되는 날 양평 자기 집으로 간다며 집을 나섰다. 친척 어른의 손에는 소년의 손이 쥐어 있었다.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 앞에 허리를 구부리고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이 어른 집에 가서 살도록 해라. 어른께서 잘 먹여 주고 학교도 보내 주신다니까 가서 말 잘 듣고 학교 공부도 잘하도록 해라.”
그리고는 소년을 꼬옥 안았다가는 떼어 놓으며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닦았다. 소년은 내키지 않고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어른들이 하는 일이니까 따라야 하나 보다 하며 친척 어른의 손에 이끌려 집을 떠났다.
소년이 집을 떠나고 3년 여가 흘렀다. 소년의 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안 염전으로 가서 일했다. 하루 품삯을 받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 뒤로 상당한 규모의 염전을 관리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소금을 도매로 떼다가 도도매나 소매로 팔기 시작하면서 강원도 화전민에서 인천의 염상으로 변신하는 데 빠르게 성공했다.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자 어느 날 소년의 아버지는 양자로 보낸 아들도 볼 겸 양평 친척 집을 방문했다. 소년의 아버지가 들어서자 친척 어른 내외는 호들갑을 떨어가며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내외의 환대는 기분 나쁘게 비굴해 보였고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주인이 내온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던 소년의 아버지는 지게 한가득 섶나무를 짊어지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아들을 보았다.
퀭한 눈에 푹 꺼진 두 볼,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은 모가지를 앞으로 늘어뜨린 소년의 모습은 피골상접 그 자체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가타부타 따질 것도 없이 막걸리 잔부터 내던졌다. 그리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을 쳐다보는 아들의 지게작대기를 빼앗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노여움 가득한 눈을 부라리며 친척 어른에게 지게작대기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휘두르고 걷어차는 대로 얻어터진 친척 어른이 복날 몽둥이질에 개 널브러지듯 마당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헐떡거렸다.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의 등에서 섶나무 가득한 지게를 벗겨 번쩍 들어 숨을 할딱거리는 친척 어른한테 내던졌다. 친척 어른의 몸뚱이가 섶나무에 덮여 버렸다.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의 손을 틀어쥐고 말했다.
“가자!”
미디어원 ㅣ 625 기획팀
📘 이 연재는 장수하늘소 출판사의 길도형 대표가 소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부친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장편 자전 서사입니다.
📅 다음 편은 6월 13일에 공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