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전환”이라는 말이 넘쳐난 지 오래다.
국가 인프라의 핵심 분야 중 하나인 금융권에서도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은행과 카드사, 정부, 언론까지 모두 ‘혁신’을 외쳐왔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대규모 고객정보 유출, 해킹 사고 등 부정적인 소식만 들려올 뿐, 성공적인 디지털 금융시대가 열렸다는 확신을 줄 만한 징표는 어디에도 없다.
<디지털 시대의 역행> 시리즈는 이 허상 속의 현실을 추적한다.
법은 디지털을 선언했지만 제도는 여전히 아날로그에 묶여 있고, 기술은 완성됐지만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는다.
‘디지털 강국’이라 자부하는 한국 사회의 실제 금융 현장은 지금도 ‘불가’라는 말 한마디에 멈춰 서 있다.
“정부24 앱만 가능합니다.”
지난주 기자는 하나은행 안양지점을 방문했다. 단순한 송금 업무지만 요즘은 ATM기기로도 송금액에 상당한 제한이 있어 현금 인출이 필요한 경우 창구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불편한 현실이다.
기다림 끝에 지정된 창구에 앉자 은행 직원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평소 실물 주민등록증을 지니고 다니지 않던 기자는 휴대전화의 PASS 앱에서 발급 받은 모바일 주민등록증을 제시했다.
“이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부24 모바일 신분증 앱으로만 가능합니다.” 창구 직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기자는 PASS 앱 또한 행정안전부가 승인한 전자증명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법적으로 실물 주민등록증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하지만 창구직원도 뒤이어 합세한 지점책임자로 보이는 차장도 “내부 규정상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행안부 공문에도 없습니다.
지점 책임자는 확인 절차를 거친 뒤, 내부에서 행정안전부 협조공문을 꺼내 보였다.
공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카카오, 네이버, 토스 등 민간앱을 통해 발급된 모바일 신분증도 신원 확인에 활용할 수 있도록 협조 바랍니다.”
즉, 민간앱 신분증을 인정하라는 협조요청문이었다.
그러나 하나은행은 이를 제한 근거로 해석했다.
“보시다시피 공문에 PASS 앱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행에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결국 기자는 단순 송금 업무조차 처리하지 못한 채 창구를 떠나야 했다.
업무는 중단됐고, 불편은 고스란히 고객의 몫이었다.
‘협조요청’을 ‘금지근거’로 바꾼 현실
행정안전부의 공문은 명백히 협조요청이었다.
정부는 다양한 민간 신분증 앱을 통해 국민이 편리하게 본인확인을 할 수 있도록 금융권에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그 요청이 오히려 “명시된 앱 외에는 불가”라는 배제 논리로 변질됐다.
이런 식의 행정과 해석은 디지털 시대의 가장 심각한 병폐를 보여준다.
법과 제도는 혁신을 말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과거의 관행 속에서 작동한다.
“정부24 앱만 가능하다”는 한 문장은 기술보다 늦은 제도, 시스템보다 느린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법과 제도의 불일치
현행 주민등록법 제7조의2(모바일 주민등록증)는 “모바일 주민등록증은 주민등록증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한다.
또한 전자서명법, 전자금융거래법, 금융소비자보호법 제19조(설명의무) 등도 금융기관이 전자적 방법으로 거래를 처리할 때 소비자에게 거래 조건을 명확히 설명하고 이해시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은행은 단순히 내부 규정을 이유로 법적으로 유효한 신분증을 거부할 권한이 없다.
오히려 국민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안내해야 할 의무가 있다.
기술보다 늦은 사고, 시스템보다 느린 인식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와 모바일 결제 시스템을 갖췄다.
그러나 시스템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시스템을 운용하는 사람의 인식과 책임 의식이 뒤따르지 않으면 ‘디지털 강국’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PASS 앱을 거부한 은행 창구의 짧은 한마디 —“불가합니다.”
이 문장은 지금 대한민국 금융권의 현실을 압축한다.
〈디지털 시대의 역행〉 시리즈는 앞으로도 이 같은 모순의 현장을 직접 기록할 것이다.
혁신을 외치며 과거에 머무는 제도, 디지털을 말하며 국민 불편을 외면하는 시스템을 끝까지 추적한다.
이정찬 발행·편집인 | 미디어원 (MEDI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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