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기준이 무너질 때 ③ ‘독립운동’이라는 단어는 어디까지 유효한가

[미디어원=이정찬 기자] ‘독립운동’이라는 말만큼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도덕적 권위를 지닌 이름은 드물다.
그 이름이 붙는 순간, 행위는 질문에서 벗어나고 평가는 멈춘다. 문제는 그 이름이 어디까지, 언제까지 유효한가라는 질문이 거의 제기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계로 한 구분은 오랫동안 흐려져 왔다. 이 연재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과 이후의 좌익 활동은 정말 같은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가.
그리고 그 구분이 사라질 때,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다시 쓰이기 시작하는가.

1948년, 저항의 시대가 끝나고 선택의 시대가 시작됐다

1948년 이전의 한반도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일제의 지배 아래에서 남은 길은 저항이거나 침묵뿐이었다. 좌익과 우익의 구분 역시 이 조건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1948년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국가가 세워지면서 헌법과 정부, 군과 법질서가 동시에 작동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의 행동은 더 이상 과거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어떤 국가에 속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가 된다.

이 변화는 단순한 행정적 전환이 아니다. 이 시점부터 정치적 행위는 ‘식민지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없게 된다. 1948년은 그래서 연도가 아니라,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이 바뀐 시간이다.

김원봉: 공은 남고, 선택은 사라질 때

김원봉은 이 문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의열단 단장으로서의 항일 무장투쟁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 공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문제는 해방 이후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남한 체제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북으로 향해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 깊이 관여했고, 군사 체제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이는 단순한 이념 성향이 아니라 명확한 체제 선택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김원봉은 ‘독립운동가’라는 이름으로만 호명된다. 정부 수립 이후의 선택은 부차화되고, 항일투쟁의 공로만이 전면에 놓인다. 이 순간 문제는 공의 인정 여부가 아니라, 국가가 개인의 선택을 평가할 기준을 유지할 수 있는가로 이동한다.

이관술: 항일과 체제 전복이 분리되지 않을 때

이관술은 정부 수립 이전과 이후의 경계가 무너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가담했고, 해방 이후에는 남조선노동당의 핵심 지도부로 활동했다.

문제는 그 이후다. 이관술의 활동은 단순한 사상적 좌익이 아니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명확하게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한 조직 활동을 이어갔고, 결국 반국가 활동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아 집행된다.

그럼에도 일부 서술에서는 이관술을 ‘미완의 독립운동가’, ‘분단의 희생자’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일제강점기 활동만이 강조되고, 정부 수립 이후의 선택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여기서 핵심은 평가의 결론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경계의 실종이다. 항일이라는 이름이 이후의 모든 행위를 덮는 순간, 국가는 스스로의 성립 조건을 설명할 기준을 잃는다.

홍범도: 군의 상징에 남는 질문

홍범도 장군 역시 이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상징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인물로서 붉은 군대 체제 안에 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다. 질문은 이것이다. 그 인물을 대한민국 국군의 상징 공간에 세우는 것이 가능한가. 군은 단순한 무장 집단이 아니라, 국가 체제에 대한 충성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이 질문을 회피하는 순간, 군의 상징성은 개인의 공적 서사에 흡수되고, 국가는 스스로 세운 기준을 흐리게 된다.

정율성과 ‘확장되는 독립운동’

정율성 논쟁은 이 흐름이 어디까지 확장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중국 공산당 군가를 만든 인물, 중국 공산혁명 체제 속에서 활동한 예술가. 그의 음악적 재능이나 개인적 성취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를 ‘항일 독립운동’의 범주로 묶는 순간, 독립운동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명확한 경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무장투쟁을 넘어, 정치 참여를 넘어, 공산혁명 참여까지 흡수되는 순간 독립운동은 역사적 개념이 아니라 모든 선택을 정당화하는 이름이 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동시에 벌어지는 일관된 하나의 흐름이다

김원봉, 이관술, 홍범도, 정율성 논쟁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같은 시기에 같은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개인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 서술과 기억의 기준이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이 과정은 봉기나 투쟁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 총과 혁명 대신, 동상과 교과서, 기념과 문화의 언어를 통해 진행된다. 선거로 권력을 얻지 못하더라도, 해석의 기준을 장악하면 다음 세대의 인식은 달라질 수 있다는 계산이 작동한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완성된 국가가 아니라 끊임없이 재평가되어야 할 대상으로 놓인다. 정부 수립 이후의 선택은 개인의 비극이나 시대의 불운으로 중화되고, 6·25의 결과 역시 명확한 책임의 문제에서 점차 ‘비극적 충돌’의 서사로 이동한다.

질문이 사라질 때, 기준도 사라진다

이 연재는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다만 묻지 못하게 되었던 질문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기록이다.

독립운동이라는 이름은 어디까지 유효한가.
국가가 수립된 이후의 선택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그 경계를 지우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기준은 계속 흔들릴 것이다.

다음 회 차에서는 이 흐름이 동상, 교과서, 기념사업, 문화정책이라는 제도적 방식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역사가 다시 쓰이는 구체적인 방법을 짚어본다. 이제 논쟁은 상징이 아니라 문서와 언어의 문제로 돌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