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이란에도 봄은 와야 한다.
서구식 민주주의의 강요도 아니고, 외부 개입의 요구나 기대도 아니다. 46년간 지속된 신권 통치가 더 이상 사회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그 정당성의 소진이 이제 거리에서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은 왕정에 대한 저항이었고, 정의를 약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신권 통치는 신앙이 아니라 규율이 되었고, 정치적 통치는 설득이 아니라 처벌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종교는 공동체의 윤리가 아니라 통제의 언어가 되었고, 반대는 이견이 아니라 반역으로 규정됐다.
문제는 억압 그 자체가 아니다. 억압은 오래된 체제에서도 유지될 수 있다. 지금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의 본질은 민심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과거의 분노가 ‘바꾸고 싶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면, 지금의 분노는 기대 자체를 거둔 상태에 가깝다. 개혁을 요구하지 않고, 타협을 청하지 않으며, 그저 이 체제의 언어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다.
히잡을 벗는 행위는 복장 규정에 대한 항의가 아니다. 최고지도자의 초상을 불태우는 장면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다. 그것은 신권정치에서 규정한 금기를 더 이상 금기 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공포 정치는 대중의 두려움을 전제로 하지만 지금 이란 사회에서 그 두려움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사태는 협상이나 부분적 양보로 봉합되기 어렵다. 요구 목록이 없기 때문이다. 임금 인상도, 법 개정도, 인사 교체도 핵심이 아니다. 문제는 “이 체제 아래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존재론적 거부에 가깝다. 통치 방식이 아니라, 통치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란의 봄은 장밋빛 혁명은 아닐 것이다.봄이 온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것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급격한 붕괴는 더 큰 혼란을 부를 수 있고, 권력의 공백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수 있다. 그래서 현실적인 변화는 전면적 붕괴가 아니라 후퇴와 재편, 즉 신권 통치의 절대성이 흔들리고 정치적 공간이 제한적으로 열리는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완전한 자유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피를 최소화하는 변화는 이 경로 외에 마땅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중동의 역사에서 봄은 늘 이렇게 왔다. 꽃보다 먼저 불이 보였고, 노래보다 먼저 침묵이 깨졌다. 그리고 봄이 오기 전, 가장 추운 밤이 먼저 지나갔다. 이란이 지금 서 있는 지점은 바로 그 밤이다.
이란의 봄은 외부가 만들어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더 이상 미뤄질 수 없는 역사적 요구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체제가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다른 계절을 선택하려 할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그 순간을 지나 다시 움직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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