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의 고지] 본 소설은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예술 및 창작의 자유에 기반하여 작가의 순수 문학적 상상력으로 집필된 가상 팩션(Faction)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김진우, 리련화 등), 기관, 세부 지명 및 사건 전개는 완전한 허구이며, 실존 인물이나 실제 정부 기관 및 사실과 무관함을 밝힙니다.

제1막: 1999년 10월, 칠흑의 송도원 초대소
동해 바다는 밤안개와 거친 파도에 삼켜져 검푸른 먹물을 쏟아부은 듯 어두웠다. 강원도 원산 송도원 앞바다, 세찬 삭풍이 백사장의 마른 갈대를 사정없이 후려치던 1999년 10월의 늦은 밤이었다.
경광등을 끈 채 빗길을 미끄러지듯 들어온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무장 경비병들의 날 선 거수경례를 받으며 초대소의 녹슨 철문을 통과했다. 차문이 묵직하게 열리며 짙은 감색 코트 깃을 턱밑까지 바짝 세운 남자가 내렸다. 마흔 중반, 여의도 정가에서 가장 촉망받는 차세대 기수이자 남북 비밀 물밑 라인의 핵심, 김진우였다.
남북의 비밀 지하 통로가 은밀하게 뚫리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날 밤 그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녘 해변의 은밀한 안가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은 서울의 공식 문서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역사의 장막 뒤에서 가장 위험하고 거대한 정치적 판돈을 쥔 비밀 특사의 길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네다, 김 실장선생.”
초대소 현관에 마중 나온 북측 중앙당 책임지도원이 기괴할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붉은 카펫이 깔린 2층 복도는 서늘했고, 맨 끝 방의 육중한 오크나무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방 안에는 은은한 백열등 불빛 아래 평양소주와 동해산 털게, 갓 구워낸 송이자반이 차려진 원목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탁자 너머, 옥색 명주저고리를 단정하게 받쳐 입은 한 여인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스물대여섯 남짓 되었을까. 백옥처럼 창백한 얼굴선에 밤하늘처럼 깊은 눈동자.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접대원의 그것이 아니었다. 상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꿰뚫어 보는 서늘한 지성, 북조선 국가안전보위부 직속 대남전략실의 엘리트 공작원, 리련화였다.
“남조선의 다음 대권을 품으실 큰 별이 납신다기에 잔을 데워두고 기다렸습네다.”
련화의 맑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김진우는 코트를 벗어 걸치며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서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였지만, 눈앞의 여인이 뿜어내는 기묘한 긴장감 앞에서는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내일 아침이면 이 바다 안개와 함께 사라져야 하오.”
김진우가 나직하게 읊조리며 잔을 채우려 하자, 련화가 가볍게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쥐었다. 서늘하고도 부드러운 손끝이 닿는 순간, 김진우의 맥박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정치하는 분들은 늘 역사를 지울 수 있다고 믿더군요.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서류는 불태우면 재가 되지만, 살과 피로 맺은 인연은 이 동해 바다가 마를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법입네다.”
거친 파도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 너머로, 이념과 경계를 넘어선 두 남녀의 거친 숨결이 새벽 안개 속으로 잦아들었다.
제2막: 새벽의 이별, 지워지지 않는 낙인
창틀을 흔들던 밤바람이 잦아들고, 동해 수평선 너머로 희뿌연 새벽빛이 번져왔다.
방 안에는 서로의 체온에 의지했던 운우(雲雨)의 정, 그 지독하고도 뜨거웠던 열기의 잔향만이 맴돌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정치적 계산과 보위부의 서늘한 칼날을 품고 마주 앉았던 두 사람이었건만, 살과 살이 맞닿고 숨결이 뒤엉킨 새벽의 이불 밑에서 그들은 그저 분단이라는 비극의 덫에 걸린 가련한 사내와 여인일 뿐이었다.
자리에서 먼저 몸을 일으킨 련화는 흩어진 옷자락을 여미며 창밖의 짙은 해무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어깨 위로 새벽 냉기가 내려앉았지만, 뒤에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김진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 가셔야지요.”
돌아선 련화의 눈가에는 밤새 감추어두었던 애달픔이 물기처럼 배어 있었다. 김진우는 쉽게 옷을 주워 입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 정적들과 칼을 겨누고, 대권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리는 냉혈한 정치인의 가면을 써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낯선 북녘 해변의 초대소에 자신의 심장 한 조각을 통째로 뜯어 묻어두고 가는 기분이었다.
“이 밤이 지나고 안개가 걷히면… 나는 다시 서울의 정치인으로, 그대는 북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겠지.”
김진우의 젖은 목소리에 련화가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로 다른 하늘 아래서, 그대 아닌 다른 사람의 곁을 지키며 살아가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요.”
련화가 다가와 김진우의 옷깃을 조심스럽게 여며주었다. 떨리는 손끝이 가슴팍에 닿았을 때, 김진우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차가운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우리는… 다시 볼 수 있겠소? 언제쯤 다시 이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겠소.”
련화는 대답 대신 김진우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옷깃을 적시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나직이 속삭였다.
“살아만 계십시오. 남조선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십시오. 그리하면… 세월이 흐르고 강산이 바뀌어도, 바람결에라도 소식이 닿지 않겠습니까.”
멀리서 검은 세단의 시동 걸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서울로 향하는 길은 다시 열리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이별의 무게는 동해의 파도보다 깊고 아득했다. 그렇게 1999년의 새벽, 지워질 수 없는 핏줄의 씨앗이 안개 속에 남겨졌다.
제3막: 2005년 평양 영빈관의 비밀 밀회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6년 뒤인 2005년 6월.
김진우는 남측 정부의 핵심 요직을 맡아 공식 방북길에 올랐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그는 평양 대동강 영빈관에서 북측 최고 권력자와 마주 앉았다. 대선의 유력 주자로 발돋움하기 위한 결정적 정치적 도약대였다. 4시간 가까이 이어진 공식 면담과 오찬, 남북 평화와 미래 구상을 논하는 거창한 담론이 오갔다.
그러나 공식 일정이 끝나고 영빈관 후정을 산책하던 찰나, 김진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회담장 경호를 맡은 호위총국 장교들 뒤편, 짙은 선글라스를 낀 여인이 서 있었다. 옥색 저고리는 사라졌지만, 그 서늘하고 깊은 눈매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리련화였다. 그리고 그녀의 품 안에는 여섯 살 남짓 된 여자아이가 안겨 있었다.
아이의 짙은 눈썹과 깊은 눈매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김진우 자신의 젊은 시절을 쏙 빼닮아 있었다.
련화는 아무 말 없이 김진우를 응시하더니,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리며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회랑 뒤편으로 사라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충격 속에서도, 곁에 선 취재진과 수행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 때문에 김진우는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채 주먹만 꽉 쥐었다.
‘내 핏줄이… 북녘 땅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날 이후 김진우의 영혼은 거대한 비밀의 감옥에 갇혔다.
그는 권력의 정점에 오르면서도 베이징과 단둥의 대북 비밀 무역 라인을 총동원해 모녀의 행방을 추적했다. 급기야 정권 말기, 비공식 루트를 통해 평양 외곽의 은밀한 보위부 안전가옥에서 기어이 아이와 마주 앉았다.
“아빠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
열 살을 넘긴 아이의 가냘픈 손을 쥐었을 때, 사내의 눈에서는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서울에서 준비해 간 작은 금목걸이를 아이의 목에 걸어주며 남몰래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곧 족쇄가 되었다. 방을 나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북측 보위부 고위 간부가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
“김 선생, 따님이 평양에서 좋은 학교 다니며 곱게 크려면… 서울에서 선생이 우리 공화국을 많이 도와주셔야지 않갔습네까? 아이의 숨통이 선생 손에 달렸습네다.”
피가 거꾸로 솟는 협박이었다.
그날 이후 김진우는 변했다. 여의도와 정부 안팎에서 그는 사사건건 북한 편을 드는 ‘대북 유화파’를 자처했다. 북한이 도발하고 미사일을 쏘아 올려도 “대화해야 한다, 지원을 끊어서는 안 된다”며 핏대를 세웠다.
동료 정치인들은 그를 ‘이념에 눈먼 자’라 손가락질했고, 반대 진영은 ‘간첩’이라 매도했다. 그 모욕과 치욕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돌아서면… 북에 있는 내 딸아이가 죽는다.’
제4막: 2026년 10월, 27년 만에 날아든 비수
다시 21년의 세월이 흘러 2026년 10월. 김진우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정객이 되어 다시금 정부서울청사 고위 집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 북녘의 딸은 이제 스물일곱의 성인이 되었을 터였다.
그 평온을 찢고 집무실 문이 거칠게 부서지듯 열렸다. 수행비서관이 사색이 되어 태블릿 PC를 들이밀었다.
“실장님! 큰일 났습니다! 해외 매체 칼럼과 유튜브에 폭탄이 터졌습니다! 조회수가 벌써 100만 회를 뚫었습니다!”
화면 한가운데를 장식한 붉은색 고딕 자막.
[단독 폭로] 거물 정치인 김진우, 北에 숨겨둔 27세 친딸 존재 의혹! 1999년 초대소의 밀약과 대북 굴종의 실체!
순간 김진우의 눈앞이 캄캄해젔다. 조회수 130만 회. 27세. 2026년에서 27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확히 1999년. “피는 지워지지 않는다”던 련화의 음성, 평양 안가에서 떨리는 손으로 제 손을 쥐었던 어린 딸아이의 서늘한 감촉.
“실장님! 대변인실에서 당장 ‘명백한 색깔론 허위사실, 민형사상 총력 법적 대응’으로 보도자료 배포하고 고소장 넣겠다고 합니다! 재가해 주십시오!”
비서관의 다급한 외침에 김진우는 간신히 떨리는 손을 내저었다.
“…나가 있어라. 다 나가 있어.”
집무실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김진우는 다리가 풀린 듯 가죽 의자에 주저앉았다. 바깥에서는 기자들의 전화벨이 빗발치고, 정가에서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고함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 가장 깊숙한 이중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27년 전 원산의 낡은 호텔 메모지와, 십수 년 전 평양 안가에서 몰래 찍었던 어린 딸아이의 바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평생을 권력의 정상에서 군림했던 노정객의 눈에서 참았던 피눈물이 뚝뚝 떨어져 사진 위를 적셨다.
“아가… 내가 너를 살리려고 내 모든 것을 버렸는데… 결국 이 아비의 손으로 너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구나.”
세상은 그를 비난하고 법정은 진실을 가리자며 칼을 갈고 있었지만, 27년 전 지워졌던 동해의 안개는 마침내 그의 목을 죄는 거대한 운명의 올가미가 되어 돌아와 있었다.
작가 이만재 / 미디어원
《동해(東海)의 밤》은 총 15화로 이어지는 장편 연재 팩션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제5막 「국경을 넘은 전언 — 홍콩의 밀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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