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영해와 항만이 러시아로 향하는 대규모 에너지 운송망의 경로로 활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영국과 유럽연합(EU)의 제재 명단에 오른 유조선들이 울산항과 여수 앞바다에서 석유제품을 선적하거나 환적한 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 구체적 항적이 확인되면서다. 정부는 “국내 통관상 대러 수출 실적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항만 출항 기록과 실제 운항 항로 사이의 간극은 제재 관리 체계의 제도적 사각지대를 드러내고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이 선박자동식별장치(AIS)와 항만 기록 등을 토대로 보도한 데이터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정유시설 타격으로 러시아의 연료 수급이 급감했던 지난 7~8월, 러시아가 해상으로 수입한 전체 석유제품(36만 8000톤) 중 31%(11만 2000톤)가 한국 항만에서 출발한 물량으로 집계됐다. 7척의 유조선이 14차례에 걸쳐 실어 나른 물량은 총 17만 6000톤 이상에 달한다.

신고 목적지와 실제 항로의 불일치… 여수 앞바다 ‘환적’ 정황

가디언이 추적한 선박 중 영국·EU 제재 대상 유조선인 ‘레일라(Layla)’호는 8월 10일 울산항을 출발하며 한국 당국에 목적지를 ‘일본 니가타’로 기재했다. 그러나 선박은 항해 도중 변침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레일라호가 두 차례 항해로 운송한 경유는 5만 7000톤이다.

러시아 국적의 제재 선박 ‘아스토리아(Astoria)’호 역시 8월 1일 울산항에서 일본행을 신고하고 1만 1000톤을 선적했으나 실제 도착지는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더 복잡한 경로는 여수 앞바다에서 나타났다. 제재 대상인 ‘청천(Chongchon)’호는 국내 부두에 접안하지 않고, 여수 정박지에서 제재 대상이 아닌 ‘셀레스트 1(Celeste I)’호로부터 경유 2만 6000톤을 넘겨받는 선박 간 환적(STS)을 거친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케이플러(Kpler) 데이터에 따르면 이 화물들의 최종 수하인에는 서방 제재 대상인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Rosneft)와 NNK가 포함됐다.

항만 출항 신고와 수출 통관 통계의 구조적 괴리

외교부·산업통상자원부·관세청은 10월 8일 공동 설명자료에서 “해당 석유제품은 현행 대외무역법상 대러 독자 통제 품목이 아니며, 정식 통관을 거친 대러 수출 실적은 없다”고 밝혔다. 선적 사실만으로 국내법 위반을 단정할 수 없다는 취지다.

그러나 정부의 ‘대러 수출 통관 실적 0건’이라는 설명만으로 실제 러시아행 운송 경로에 대한 관리 책임까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항만의 출항 목적지 신고와 관세청의 수출 통관 통계는 집계 기준과 성격이 다른 별개의 기록이다.

화물이 제3국으로 수출 신고되거나 환적 절차를 거칠 경우 최종 도착지가 러시아라 해도 통관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다. 항만 출항 신고와 수출 통관 자료, 실제 하역 기록을 교차 검증해 최종 목적지와 화물 소유권의 이동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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