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라는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지 오래된 현대인들이 시속 30km 로 달리는 경전선 기차 여행을 떠나려면 , 조급함은 잠시 내려놓아 될지도 모르겠다 .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시속 38 ㎞ 로 질주하는 우사인 볼트와 비교해 봐도 좋을 것이다 . ‘ 여행 ’ 그 자체의 의미를 찾고 싶을 때 시간과의 전쟁에서 벗어나 한껏 여유로울 수 있는 경전선 기차여행을 소개한다 .
대합실엔 다람쥐 , 벚나무엔 딱따구리 < 광주 송정역 ~ 남평역 ~ 진상역 >
전라남도 광주에 위치한 송정역은 경전선의 첫 출발지점으로 도착역인 경상남도 밀양의 삼랑진역까지 약 5 시간 40 여분 정도 걸린다 . 이 열차의 테마가 ‘ 느림 ’ 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 가능한 한 빠르고 많이 ’ 여행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시도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
볼트보다 느린 이 열차가 달리는 구간은 전체 길이 300.6km 로 전 구간이 단선이다 .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며 강산을 굽이굽이 도는 경전선은 열차를 타는 승객들의 억양이 서서히 바뀌는 것 마저 느낄 수 있다 .
경전선이 느린 데는 까닭이 있다 . 경전선은 잠시도 직선을 달리지 못한다 . 광주에서 출발해 크게 화순과 보성 · 순천 · 광양 · 하동 · 진주 · 마산을 돌아 밀양까지 가 닿는 동안 , 마주치는 강산을 굽이굽이 돌아 흐른다 . 무엇보다 단선이기 때문에 마주 오는 열차가 있으면 간이역에서 서로 지나칠 때까지 기다린다 .
경전선 여행의 진정한 시작은 전남 나주에 있는 간이역 , 남평역이다 . 역사에서 플랫폼까지 짧은 거리를 정원으로 꾸며 정원 사이로 난 오솔길로 이 두 공간을 잇는다 . 대합실에는 다람쥐가 드나들고 벚나무엔 딱따구리가 구명을 뚫었다 . 자연과 하나가 된 간이역에서 바라 본 철로의 붉은 녹은 사이사이 놓인 나무 침목 색을 닮아 있다 .
경전선 열차에서 바깥 풍경은 만져질 듯 가깝다 . 남평역부터 기차 밖은 평범한 도시 풍경에서 남도의 절경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 80 년간 같은 길을 달린 열차는 광주에서 순천을 거쳐 여수를 잇는 동안 , 단풍의 대향연과 추수를 하고 속살을 드러낸 넓은 대지가 시간의 변화를 실로 아름답게 말하고 있다 .
슬슬 허기가 질 즈음 열차는 전남 광양 진상역을 지난다 . 겉보기엔 영락없이 역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 대합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식탁이 있고 안내판이 붙어 있을 자리에 메뉴가 있다 . 메뉴 위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이름은 ‘ 진상영농한우촌 ’ 이다 . 2004 년부터 역무원을 배치하지 않아 버려진 역사를 작년에 한우식당으로 바꿨다 . 간혹 창밖으로 지나가는 열차를 보며 밥 먹는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
작은 마을을 돌아 산책길로 들어서면 < 북천역 ~ 진주수목원역 ~ 밀양 삼랑진역 >
전라도를 통과하는 경전선이 남도의 자연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면 , 경상도로 넘어선 경전선은 아기자기한 간이역과 마을의 조화를 보여준다 . 그중 절정은 경남 하동 북천역이다 . 엄밀히 말해 북천역은 역장이 근무하기 때문에 보통 역이지만 간이역의 정취를 풍기고 있다 .
소백산맥 줄기가 끊어질 듯 산을 흩뿌린 하동 동남쪽에 자리 잡은 북천역은 꽤 높은 곳에 있다 . 멀리 산이 병풍을 치고 가까이 논과 마을을 품어 아침과 대낮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 아침엔 짙은 안개로 부옇고 , 대낮엔 눈부신 햇빛으로 선명하다 .
역만 보고 가면 아쉽다 . 마을을 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 앞 북천면사무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는 것이다 . 마을은 역사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로 작고 , 그 작은 마을을 돌아 산책길이 나 있다 . 자전거 타다가 지치면 아담한 세종대왕상을 앞에 내세우고 서로 붙어 있는 옥종중학교 북천분교와 북천초등학교에서 쉬어가자 . 좀 더 욕심이 난다면 북천역에서 자전거로 10 분 정도 떨어진 이병주문학관을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또 수목원을 이름에 품은 능주역 인근에는 산책하기 좋은 진주수목원이 있다 . 이 간이역의 역사는 유독 짧다 . 경전선에서 다른 역들이 대부분 폐역으로 생을 마감할 때 , 이 역은 유일하게 새로 태어났다 .
진주수목원역은 가장 간이역답다 . 정면으론 너른 들판을 , 뒤편으론 개암리를 낀 이 역은 역사 없이 녹색 울타리와 벤치뿐이다 . 역에서 나와 ‘ 수목원 가는 길 ’ 표지판을 따라 약 20 분쯤 걸으면 이 역의 존재 이유가 나타난다 . 바로 경상남도 수목원이다 . 없던 역을 새로 지을 만큼 이 수목원은 매력적이다 . 담양 못지않은 아름다운 길이 있고 야생동물원이 있다 . 북천이 연인과 함께 가기 좋다면 , 경남수목원은 가족과 함께 가기 좋다 .
여행팁
경전선을 지나치는 역 중에는 반드시 들러 먹어야할 먹거리들이 있는 역이 있다 . 낙동강의 진미 낙동강역 – 오리국밥 , 보양식인 마산역 – 어탕국수 , 섬진강에서 맛보는 하동역 – 은어 밥 , 광양 숯불고기의 명성이 그대로인 광양역 – 숯불고기 , 푸짐하기로 유명한 순천역 – 된장 아귀탕 , 홍어 요리의 결정체 나주 남평역 – 흑산도 홍어는 놓치지 말아야 할 별미다 .
여유롭게 여행하고 싶다면 하루 묵는 편이 낫다 . 간이역이 있는 마을은 대부분 숙박시설이 없으니 전남 순천 · 경남 하동 · 경남 진주 등 인근 도시로 나와야 한다 . 각 지자체 관광홈페이지에서 숙박시설을 확인할 수 있다 . ( 순천 : tour.sunchoun.go.kr, 하동 : tour.hadong.go.kr, 진주 : tour.jinju.go.kr)
간이역의 매력은 천차만별이다 . 드라마 ‘ 여름향기 ’ 를 찍었던 명봉역은 붉은 벽돌이 아름답고 화순역은 승강장 소나무가 볼만하다 . 이제는 문을 닫은 앵남역과 석정리역 , 다솔사역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아련함을 간직하고 있다 . 경전선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둘러보고 싶은 역을 정해 떠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경전선 전체를 운행하는 열차는 하루 단 1 회 왕복이다 . 광주 송정역에서 오전 10 시 13 분에 출발한 열차는 밀양 삼랑진역에 오후 16 시 6 분에 닿는다 . 역방향은 삼랑진역 오전 7 시 38 분 출발 , 광주 송정역 오후 13 시 23 분 도착이다 . 성인 1 만 8000 원 , 주말 ( 금 ∼ 일 ) 은 1 만 8900 원 이다 . 어린이 ( 초등학생 이하 ) 는 50% 할인된다 . 서울 용산역에서 KTX 를 타고 광주 송정역을 갈 경우 약 3 시간 소요되니 참고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