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재 기자ㅣ 미디어원
북한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하고, 중국은 대만 유사시 한반도 내 미군 기지를 1순위 타격 대상으로 공언한다. 러시아는 공개 석상에서 한국을 실명 거론하며 경고의 수위를 높이며, 이란은 한국 원유 수입의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카드로 흔든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경고장 앞에서 한국은 매번 유감 표명이나 침묵, 혹은 소모적인 내부 정쟁으로 대응해 왔다.
왜 이 지경이 됐는가.
이는 단순히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다. 수십 년간 누적된 전략적 나태함과 외교의 정치 도구화가 만들어낸 구조적 패착이다.
‘제2전선’이 된 한반도: 지정학적 운명과 경제 안보의 결합
냉혹한 팩트를 직시해야 한다. 최근 중동에서 벌어진 이란의 드론·미사일 전술은 대만 해협 분쟁 시 중국이 아시아 지역의 미군 기지를 어떻게 무력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조다. 군사 전문가들은 중국이 개전 초기 불과 몇 시간 안에 평택 캠프 험프리스를 포함한 주요 거점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역량을 이미 갖췄다고 경고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 안보는 곧 경제다. 호르무즈 해협의 불안은 에너지 위기를 부르고, 대만 해협의 긴장은 반도체 공급망의 붕괴와 직결된다. 안보가 흔들리면 우리 식탁의 물가와 일자리가 가장 먼저 타격받는다. 지정학적 위치가 이미 우리를 전선에 세웠음에도, 우리는 경제와 안보를 분리해 생각하는 안일함에 빠져 있었다.
2. ‘5년 주기 리셋’의 함정: 약한 고리는 신뢰에서 생긴다
한국 외교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는 정권 교체 시마다 노선이 180도 뒤집힌다는 점이다.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가며 전임 정권의 성과를 부정하는 사이, 상대국 입장에서 한국은 ‘조금만 기다리면 태도가 바뀔 나라’로 전락했다.
외교는 타이밍과 속도다. 핵심 보직 인사가 늦어지고 정책 인프라가 정권 입맛에 따라 리셋되는 구조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전략도 실행 단계에서 병목 현상을 일으킨다. 중국이 한국을 한미일 공조의 ‘약한 고리’로 보고 집요하게 공략하는 이유는 우리의 국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뢰는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국가적 일관성에서 나온다.
북·중·러 삼각 연대와 내부 정쟁의 괴리
북·중·러는 이제 이념을 넘어 ‘현상 타파’라는 공통의 목표로 결집하고 있다. 이들이 삼각 연대를 굳히며 한국을 압박하는 동안, 우리는 안보 이슈를 국내 정치적 선동과 정쟁의 카드로 소비했다.
대만 유사시 한반도가 자동으로 전시 상태에 돌입할 수 있다는 국제 사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비할 내부 정치적 역량은 고갈된 상태다. 적들이 동맹을 강화하는 시간에 우리는 내부에서 에너지를 소진하며 스스로 ‘동네북’의 길을 선택한 셈이다.
가치가 아닌 ‘실력’의 동맹: 거래의 시대를 대비하라
동맹은 더 이상 무조건적인 가치가 아니라 냉혹한 ‘거래’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주한미군 사드 자산이 중동으로 반출된 사례는 동맹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안보가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다.
미·중 사이의 줄타기가 양쪽 모두의 존중을 이끌어낼 것이라는 환상은 끝났다. 원칙 없는 유연성은 기회주의로 비칠 뿐이며, 결국 양쪽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결과만 초래한다. 동맹을 깊게 유지하되, 동시에 미국 없이도 적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자체적인 억제력을 갖추는 것만이 진정한 전략적 자율성이다.
대한민국,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는가
첫째, 외교 노선의 초당적 연속성을 제도화해야 한다. 정권과 관계없이 국가 생존 전략을 지탱할 민관 합동의 상설 전략 기구가 시급하다. 외교는 5년 단위 프로젝트가 아닌 국가의 백년대계여야 한다.
둘째, 경제 안보를 외교의 핵심 축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에너지와 반도체 공급망은 이제 군사력만큼 중요한 안보 자산이다. 이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과 그에 따른 경제적 비용을 국민에게 정직하게 설명하고 합의를 구해야 한다.
셋째, 한·일 관계를 감정이 아닌 ‘생존의 영역’으로 전환해야 한다. 과거사의 고통과는 별개로, 거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실질적인 안보 협력 가이드라인을 구축하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다.
결론: 경고를 무의미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동네북은 약해서 되는 게 아니라, 맞아도 아무 대응이 없을 때 만들어진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외교적 진공 상태를 적들이 파고들었을 뿐이다. 일관된 노선, 강화된 자강 능력, 신뢰 기반의 동맹, 그리고 냉정한 현실 인식—이 네 가지가 갖춰질 때 한국은 경고를 ‘받는’ 나라에서 경고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나라로 거듭날 수 있다.
시작은 이 불편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부터다.
“우리는 정권의 생존이 아닌, 국가의 생존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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