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 가난을 견디고 무명 시절을 버텨 정상에 오른 사람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출발해 충무로의 주연배우가 된 사람이라면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 박수가 보장하는 권한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연기를 잘한다는 사실이 세상을 잘 안다는 증거는 아니다. 흥행에 성공했다고 정치적 판단까지 탁월해지는 것도 아니다. 가난했던 과거가 현재의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이 당연한 구분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배우가 사회문제를 논평하면 통찰이 되고, 감독이 정치를 비판하면 시대정신이 된다. 시상식 무대에서 던진 한마디는 검증 없이 뉴스의 제목을 차지한다. 작품으로 얻은 명성이 어느새 사회를 판단하는 권위로 확장된다. 대중은 그들의 연기에 감동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그들이 대중의 양심을 대신 말하는 사람처럼 등장한 것이다. 도대체 누가 그 권한을 주었는가.
저항마저 상품이 되는 시대
스크린 속에서는 재벌을 응징하고 권력의 부패를 폭로한다. 사회적 약자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불의에 맞서 분노한다. 관객은 환호하고 작품은 흥행한다. 그 자체로 문제는 없다. 권력을 비판하는 작품은 필요하고 약자의 고통을 연기하는 것 역시 예술의 역할이다.
문제는 영화가 끝난 뒤 시작된다. 스크린 속 저항의 이미지가 배우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으로 옮겨가고, 그 이미지가 현실에서 발언권의 근거가 되는 순간이다. 영화 속 정의로운 인물을 연기했다고 현실에서도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독재자에 저항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까지 갖추었다고 볼 수도 없다.
작품의 이미지가 배우에게 덧씌워지고 배우의 정치적 발언이 다시 작품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그 과정에서 저항은 하나의 상품이 된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배우가 부자가 됐다는 사실이 아니다. 큰돈을 벌었다고 약자를 대변할 자격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경제적·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언제까지나 저항하는 약자의 위치에 놓으면서, 그 이미지로 대중에게 도덕적 우위를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때의 반지하 생활이 평생의 도덕적 면허증이 될 수는 없다.
정치적 신념은 어떻게 브랜드가 되는가
연예인의 사회적 발언은 대중문화 시장에서 경제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정치적 입장을 선명하게 밝히면 일부 팬은 떠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자신의 신념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정치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결속력 높은 지지층이 형성되고, 그 지지는 작품 소비와 홍보, 광고 효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모든 사회적 발언이 계산된 마케팅이라는 뜻은 아니다. 신념 때문에 비난을 받거나 광고를 잃을 수도 있다. 그 반대 방향의 경제적 효과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정치적 입장 표명은 신념의 표현인 동시에 개인 브랜드를 형성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그들이 외치는 정의는 신념인가, 브랜드인가. 아니면 신념을 브랜드로 만든 비즈니스인가.

인기는 전문성이 아니다. 유명세는 양심의 증명서도 아니다
연예인도 시민이다.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집회에 참여하며 사회문제를 비판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발언할 권리와 그 발언이 옳다고 인정받을 권리는 다르다. 배우가 훌륭한 연기를 한다고 경제정책까지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감독이 위대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외교·안보 판단이 전문가보다 정확해지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학력 문제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어도 깊이 공부한 사람은 있고, 높은 학위가 있어도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있다. 무엇을 공부했고 어떤 근거를 갖고 있으며 반대하는 시민의 논리를 얼마나 성실히 검토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일부 유명인의 발언은 내용보다 이름값에 먼저 권위를 부여받는다. 언론은 이를 사회적 의제의 중심으로 끌어올리고 지지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권위처럼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평범한 시민의 경험과 판단은 쉽게 뒷전으로 밀린다. 연예인이 정치 이야기를 해도 되는가가 아니다. 왜 그 정치 이야기가 평범한 시민의 발언보다 더 큰 권위를 가져야 하는가.
공익을 말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사적 이익
2020년 방송인 김미화는 안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공개모집을 거쳐 임명됐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그렇다고 정치적 활동에 대한 보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반대로 공개모집이라는 절차가 있었다는 설명만으로 인사의 공정성과 적격성이 충분히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시민이 알고 싶은 것은 경쟁자와 비교해 어떤 전문성과 조직 운영 능력을 인정받았고, 명성과 정치적 친밀성이 인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이다. 공공기관 자리는 명성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시민에게 책임지는 자리여야 한다.
공직은 가능한 보상의 한 형태일 뿐이다. 광고, 방송 출연, 강연, 행사, 캐스팅, 문화단체 직책까지 사회적 이미지가 경제적·사회적 기회와 만나는 통로는 다양하다. 특정 인물의 기회가 정치적 발언의 대가라고 증거 없이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익을 내세운 활동이 사적 경력의 자산이 되는 구조를 분석하는 것까지 금기시할 이유는 없다.
약자를 대변한다는 사람은 누구에게 위임받았는가
유명인의 선행과 연대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기부를 늘리는 일은 존중받아야 한다. 실제로 난민 구호 활동을 해온 배우도 있고 장기간 직접 기부한 사례도 있다. 그 사실을 지워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난민을 지원한다는 사실이 난민 정책에 우려를 제기하는 시민의 목소리를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좋은 목적을 지지한다고 복잡한 정책의 비용과 위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민 역시 자신의 삶에서 정책의 결과를 감당한다. 선한 목적을 말할수록 불편한 질문에 더욱 성실하게 답해야 한다.
유명인이 약자를 위해 발언하는 것과 약자를 대표할 자격을 얻는 것은 다르다. 누군가를 도왔다는 사실은 존중할 일이지 다른 사람 위에 설 권리를 얻었다는 뜻이 아니다.
대중의 박수는 위임장이 아니다
연예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언론은 유명인의 발언을 특별한 통찰처럼 다루고 정치권은 인지도를 빌려 메시지를 확산하며 대중문화 산업은 사회적 이미지를 마케팅 자산으로 활용한다. 정치권에는 확성기가 필요하고 유명인에게는 이미지를 강화할 기회가 생긴다.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구조다.
그 구조가 언제나 부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해관계를 덮어두고 정의와 양심만 이야기한다면 현상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정의를 외치는 사람도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고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 역시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사람이 문화산업의 강력한 기득권자일 수도 있다.
배우에게 침묵하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다. 감독에게 정치적 신념을 버리라고 요구할 이유도 없다. 다만 다른 분야에 관해 발언한다면 누구의 주장과도 똑같이 사실과 논리로 검증받아야 한다. 가난했던 과거도, 수상 경력도, 천만 관객의 박수도 그 검증을 대신할 수 없다.
눈물 젖은 빵은 존중받을 과거이지, 평생 갱신되는 도덕 면허증이 아니다. 사회적 정의는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다. 유명인의 전유물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당신의 연기에 박수를 보냈다. 당신이 만든 영화에 기꺼이 관람료를 지불했다. 훌륭한 작품이라면 앞으로도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우리는 당신의 연기에 값을 치렀다. 당신에게 우리의 양심을 맡긴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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