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했던 과거, 피로 물든 현재

에티오피아에서 기원한 최초의 커피는 아랍세계로 전파되면서 값비싼 기호식품이 됐다 . 중세유럽에서는 커피를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 이슬람 문명권은 이때까지만 해도 예멘 외의 지역에서 커피 재배를 금지시켰다 .

아라비아 반도 서남쪽에 자리한 이 조그만 나라는 남쪽에 홍해와 인도양을 접하고 있어 중동 아랍권에서는 드물게 초록이 풍부하고 온난 습윤한 기후를 가졌다 . 이 지역의 중앙 산간지인 배니 마타리 지역에서 나는 커피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커피다 .

바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했던 커피의 귀부인 ‘ 예멘 모카 마타리 ’.


가장 먼저 커피를 사랑했던 그들

예멘은 세계 최초로 커피를 대량 경작했고 , 아프리카나 아랍세계에서 생산된 커피의 대부분이 예멘의 ‘ 알 모카항구 ’ 에서 수출했던 전통적인 커피생산국이다 . 유명한 예멘의 모카커피는 바로 항구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

아직까지도 예멘의 커피 농장은 현대화하지 않고 소량의 커피를 자연 건조시키는 400 년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 수확한 그대로 생두의 등급이나 선변작업을 거치지 않는 것이다 . 이로 인해 겉으로만 봐서 예멘의 원두는 모양도 제각각이고 , 크기도 천차만별이다 . 하지만 자연건조로 인해 톡 쏘면서도 초콜릿 향과 같은 풍미를 지니게 된다 . 이 독특한 향으로 예멘 모카 마타리는 초기에 커피 사탕이나 초콜릿의 재료로도 사용될 정도로 대중화되기도 했다 .

예멘 커피는 전통적인 올드 아라비카 품종으로 재배되며 비옥한 토양과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으로 커피 재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 특히 모카 마타리가 재배되는 배니 마타리 지역은 산악지역으로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고원지대다 . 오래전부터 커피산업이 발달한 예멘은 주요 수출품인 커피나무를 위해 치수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

비가 부족한 해를 대비해 자연 수로를 만들고 , 수로를 인공적으로 조절해 암반수가 커피나무에 제대로 흡수되도록 한 것이다 . 또한 물이 없어도 잘 자라는 사막의 포플러를 주변에 심어 커피나무가 강한 햇볕에 상하지 않게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

전통의 재배방식은 낮은 노동생산성과 높은 가격으로 대단위 영농시설을 갖춘 아프리카나 남미와 경쟁하는 것이 쉽지 않다 . 한때 세계 최대 커피 생산지였던 과거의 영광이 많이 퇴색됐지만 예멘의 모카마타리는 특유의 상큼함과 다크초콜릿을 연상시키는 풍부한 향미로 여전히 커피의 귀부인이라는 작위를 손에 쥐고 있다 .
전통적인 예멘 커피는 껍질째 말린 커피 열매를 구워 그대로 빻아 끓는 물에 넣고 우려낸다 . 그래서 향과 맛은 우리의 한약다린 물 같은 느낌도 난다 . 최근 예멘에서는 커피를 대체한 새로운 기호식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 바로 카트라 불리는 식물이다 . 남아메리카의 ‘ 코카 잎 ’ 과 비슷한 효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 식물은 정신을 약간 혼미하게 만들어 예멘 국민의 건강이나 경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한다 .

어쨌든 한때 대단위 커피 농장이었던 곳들이 이제 카트농지로 바뀌고 있어 예멘의 커피 산업은 점점 하락하는 추세다 . 커피와 달리 별도의 가공공정이 없이 생잎을 바로 씹는 카트가 커피보다 훨씬 이윤이 많이 남는다는 이유다 . 다행히 지방에서는 수출용 커피 농장이 몇 군데 남아있고 , 소규모의 원두 생산으로 명맥을 유지한다 .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의 위상이 품질 저하로 인해 추락했을 때 일본인들의 대대적인 투자가 이어져오던 것을 보면 커피의 역사 그 자체인 예멘의 커피산업에 자본이 투입되지 않은 이유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 아마도 무역요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외부로 유출되는 정보를 제한했던 과거 폐쇄성의 답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

예멘 구사나지역
발에 걷어차이는 돌멩이마저 문화재 ?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예멘은 가장 오래된 인류의 거주지 중에 하나다 . 아시아 , 아프리카 , 유럽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예로부터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면서도 아랍인의 독특한 기질과 문화적 전통성이 가장 잘 이어져 가고 있는 나라다 . 오래도록 무역의 중계지 , 집산지 역할을 하며 크게 번영하기도 했지만 오스만 튀르크와 영국에 연이은 점령당하기도 했다 .

이후 1967 년 우리나라처럼 예멘아랍공화국 ( 북예멘 ) 과 영국령으로 남아있던 예멘인민민주공화국 ( 남예멘 ) 분단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 1990 년 5 월 마침내 예멘공화국이 선포되며 통일을 이뤘지만 과거 유통의 중심지였던 예멘의 지리적 이점은 이슬람 무장 조직의 이동통로로 변질돼버렸다 .

이제는 포브스지가 선정한 ‘ 해외 여행하기에 가장 위험한 나라 15 곳 ’ 가운데 여덟 번째를 차지하고 , 악명 높은 외국인 납치와 끝나지 않는 부족 간 전쟁과 테러로 혼란스럽다 . 수려한 자연 경관과 돌 벽마저 천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구 ( 舊 ) 사나지역의 서쪽지구는 시대를 뛰어 넘는 단정함을 선사하지만 서구 열강의 대한 배타심 때문인지 지독한 폐쇄성을 갖고 있는 국가다 .

약 3,000 년 전 구약성서 속 노아의 아들이 세운 인간 최초의 도시 중 하나가 ‘ 사나 ’ 로 바로 예멘의 수도다 . 400 년 이상 된 가옥과 상가들이 즐비하고 향료 , 장식품 , 잠비아 ( 단검 ) 등 다양한 제품을 사고파는 시장도 자리하고 있다 . 이 오래된 도시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이면서 동시에 아랍세계의 3 대 유물로 꼽힌다 .

모카 원두
사나로부터 173 ㎞ 정도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리브는 기원전 10 세기부터 800 년간 예멘을 통치했던 시바왕국의 고대 수도다 . 솔로몬과의 만남으로도 유명한 시바여왕에 통치하던 이곳은 인도양으로부터 지중해로 운반되던 금과 향료의 운송로로 1,200 여 년간 역사 속에 자취를 남긴 곳이다 . 지금은 루브 알하리 사막 가운데 작은 마을로 남아 있는 이곳은 BC 8 년에 건설된 세계 최초의 댐 , BC 400 년에 건설된 빌키스 사원 등의 유적들이 남아있고 현재 한창 발굴 중인 시바 유적지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유물이 대규모로 출토되고 있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

예멘은 이슬람교국이기 때문에 라마단 기간 중에 외국인은 이슬람교도 앞에서 음식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좋다 . 특히 거리에서의 흡연은 삼가도록 해야 하고 , 그들의 종교생활에 거슬리는 행동은 금물이다 . 이들은 왼손은 불결한 일에만 사용하고 오른손은 깨끗한 일에 사용하기 때문에 현지인과 물건을 주고받거나 , 음식을 주고받을 때도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해야 한다 .

이슬람 국가의 특성으로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축제는 대부분 종교적인 색채가 짙다 . 가장 대표적인 축제는 금식기간인 라마단이 끝난 후 행해지는 단식 종료 축제일이다 . 이슬람력으로 10 월 첫날부터 사흘간 이어지는 행사로 이 날 남자들은 해가 뜬 직후부터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사원에 모여 예배를 보고 , 여자들은 조상이나 친척들의 묘소에 성묘를 간다 .

이 외에도 이슬람교도들이 지켜야 하는 5 대 의무에 해당하는 순례를 기념하기 위한 12 월 성지순례 축제일이나 이슬람력 1 월 1 일인 새해를 맞는 원단 , 마호메트의 탄생일을 기리는 예언자의 생일 등이 있다 .

인류의 가장 오래된 도시 , 그 역사가 깊게 패어있는 예멘이라는 국가는 어쩌면 쇄락의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른다 . 경작 규모가 축소되고 있는 커피의 귀부인 예멘 모카커피도 그 나라의 전철을 밟고 있는지 모른다 . 모든 것은 흥망성쇠가 있다고 하지만 타오를 때의 빛이 눈부셨던 만큼 그것의 몰락을 바라보는 일은 더 애달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