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이정찬 기자] 청량산 (870.4m) 은 자연풍경이 수려하고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의 아찔함으로 일찍이 옛 선인들의 눈과 마음을 매료시킨 명산 중의 명산이다 . 만학천봉 ( 萬壑千峰 ) 의 장중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청량산의 산세와 기암절벽을 끼고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의 풍광이 자연을 벗 삼고 비움으로 넉넉함을 채우려했던 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
청량산은 고대 불가의 산이라 하여 ‘ 수산 ‘ 이라고 불리었다 . 수산의 명칭이 유가의 산 ‘ 청량산 ‘ 으로 바뀐 건 조선시대부터다 . 소수서원을 세운 것으로 유명한 주세봉은 풍기군수로 부임 ( 중종 36 년 , 1541 년 ) 하여 청량산을 유람하고 「 유청량산록 ( 遊淸涼山錄 ) 」 을 남기며 불교식 이름이던 청량산의 12 봉우리 이름들을 모두 유교식으로 바꾸었다 . 이후 주세봉의 후배였던 퇴계 이황이 「 유청량산록 」 의 발문을 써 청량산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
고대 청량산의 뿌리 깊은 불교문화와 흔적은 원효대사 (617~686 년 ) 가 세운 청량사유리보전 (663 년 , 문무왕 3)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당시 청량산에는 사찰과 암자가 27 곳이나 들어서 산 짜기 골짜기마다 불경과 법경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 아쉽게도 현재는 청량사유리보전과 외청량사의 응진전 (683 년 ) 만이 남아 있다 .
이후 통일신라시대 서예가 김생 ( 金生 ) 이 글씨를 공부한 곳으로 알려진 ‘ 김생굴 ‘ 과 학자이자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 수도한 ‘ 풍혈대 ’ 그리고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쌓은 ‘ 공민왕 산성 ‘ 을 비롯해 퇴계 이황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 청량정사 ‘ 등 일세를 풍미하고 , 각 분야의 침봉으로 세상을 이끌었던 선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
# 청량산에 숨은 ‘ 역사적 보물 ’ … “ 연대사의 한 획은 청량산에서 시작됐다 ”
청량산의 깎아지른 암벽과 능선을 따라 솟아난 거대한 암봉의 위용 앞에선 ‘ 누멘적 감각 (sensus numinis)’ 만 느낄 뿐 다른 설명을 덧댈 수조차 없다 .
청량산의 단풍 절경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하다 . 가을의 초입인 9 월 단풍 절경으로 이름 난 청량산의 모습은 아쉽게도 볼 수 없었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 눈이 부시도록 짙푸른 창공과 청량산이 나와 하나 되는 설렘으로 등산로 초입에 들어선다 . 도로 길가에 커다란 선돌 ‘ 입석 ‘ 이 산행의 들머리임을 알려준다 .
청량산은 높지는 않으나 기암절벽이 많고 험준하여 인접을 쉬이 허락지 않았다 . 또한 다른 곳과 달리 물이 귀해 청량산을 좋아했던 퇴계 선생은 도산서원을 지을 적에 청량산에 짓고 싶었으나 물이 흔하지 않자 탄식했다고 전한다 . 그러나 청량산에서는 깊은 골짜기 청류에 발 담그고 망중한을 즐기는 기쁨 대신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아찔하고도 경이로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면할 수 있는 곳이다 .
입석에서 시작된 좁은 산길을 따라 급경사의 계단길과 흙길을 반복하며 오르길 40 여분 깔딱 숨이 턱밑에서 숨고르기에 여념 없다 . 큰 숨을 몰아내 쉬고 산모롱이를 돌아서니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 ‘ 여기가 서방정토 ( 西方淨土 ) 로 들어서는 관문이 아닌가 ‘ 하는 착각마저 일으킨 이곳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 응진전 ‘ 이다 . 거대한 수직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응진전은 금탑봉 그늘아래 신선이 살았을 법한 고귀한 자태로 자리해 있다 . 천 길 낭떠러지 바위 끝자락에 도량을 세우고 연대사의 쟁쟁한 수많은 선인들이 수도와 수행의 길을 걸었을 일이다 .
두 세 곳에 마련된 응진전 전망대는 청량산을 가장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제일의 풍경들을 보여준다 . 원효대사가 머문 이 자리에 의상대사가 683 년 응진전을 창건했다고 하니 개산조사 ( 開山祖師 ) 의 도량을 바라보는 심안은 같았나보다 .
원효대사의 구도를 위한 수행의 길을 따라 걷노라니 샛길 언덕 위 거대한 천연 동굴이 눈에 들어온다 . 신라말 대문장가 최치원이 수도를 하며 책을 읽고 바둑을 두었다는 ‘ 풍혈대 ( 風穴臺 )’ 이다 . 청량산내에서도 외딴 곳에 위치한 풍혈대는 최치원의 책장 넘기는 소리마저 울릴 만큼 한적하다 . 한시대의 최고 학자이자 대문장가의 도량이 이곳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
이어 한눈 팔 틈도 없이 어풍대 ( 御風臺 ) 가 나타난다 . 전국시대 ( 戰國時代 ) 정나라 사람인 열어구 ( 列御寇 ) 가 바람을 타고 보름 동안 놀다가 돌아갔다고 하여 어풍대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어풍대 왼쪽에는 연화봉이 솟아 있고 , 오른쪽으론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선 탁필봉이 , 그 옆으로는 연적봉과 자소봉이 청량산 암봉의 위풍당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 그 아래 한 가운데는 천 년 고찰 청량사가 산의 포근한 기운에 안겨 아늑하게 자리해 있다 .
청량산 12 봉우리 중 연화봉 기슭에 자리한 청량사는 원효대사가 창건 (663 년 ) 했다고 전해지는 고찰로 수려한 산세와 어울린 기품 있는 자태가 가히 형용할 수 없는 풍경을 연출한다 . 청량산 12 봉우리가 연꽃의 꽃잎과 같고 , 청량사는 그 가운데 꽃술과 같다는 비유에 탄복할 뿐이다 .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절과 그 옆을 듬직하게 지키는 석탑 , 그리고 절 오른쪽에 퇴계가 공부하던 곳에 지은 청량정사가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
퇴계 이황은 청량산가 ( 淸凉山歌 ) 에서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 白鷗 )
백구야 날 속이랴 못 믿을 손 도화 ( 桃花 ) 로다 .
도화야 물 따라가지 마라 어주재 ( 漁舟子 ㅣ ) 알까 하노라 .
를 읊으며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 감추고 감추어 혼자만의 것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을 만큼 말이다 .
청량사가 세워지고 몇 십 년이 지나 김생 ( 金生 ) 이 청량산 자락을 찾아들어 10 년간이나 글씨를 쓰고 수행했다 . 이곳에서 김생은 당대 최고의 왕희지체나 구양순체를 능가하는 힘찬 ‘ 김생체 ‘ 를 탄생시킨다 . 가파른 비탈길을 800m 올라서니 최치원의 풍혈대보다 더욱 웅장한 동굴이 나타난다 . 반원형의 벼랑을 타고 떨어지는 천연 폭포수와 그 옆에 자리한 김생굴은 김생체의 웅혼함만큼이나 풍기는 기운이 남다르다 .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김생은 오직 글씨 쓰는 일에만 매진했고 나이 80 에 이를 때까지 그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 하나의 일념으로 정신일도 했던 김생의 노력은 이후 중국에까지 해동서성 ( 海東書聖 ) 의 힘차고 거침없는 필적을 남긴다 .
김생굴을 뒤로하고 이어지는 청량산 산행은 능선을 따라 자소봉 (840m) 을 지나 어느새 자란봉 (806m) 과 선학봉 (826m) 을 잇는 하늘다리 앞에 다다른다 . 길이 80m 가량의 봉화 하늘다리는 청량산의 명물이자 최고의 전망대이다 . 험준하고 가파른 두 봉우리를 연결한 하늘다리 위를 걷는 재미가 마치 하늘 창공에 나를 띄워 놓은 듯 아찔하다 . 흔들리는 하늘다리 한 가운데서 울며 매달리는 사람도 여럿이다 .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다리에 주저앉은채 고함치는 이들의 속내는 어떠할까 싶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터지는 웃음은 이곳에서만 보고 가질 수 있는 해프닝일 것이다 . 구름 위를 걷듯 , 하늘에 떠가듯 옮긴 발걸음은 어느새 청량산의 산행 마지막 지점인 장인봉 (870m) 에 오르며 머릿속이 맑아짐을 느낀다 .
청량산 최고봉에 올라 다시금 사방을 둘러보니 원효 , 김생 , 최치원 , 이황이 무릇 큰 뜻을 품고 청량산을 찾은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다 . 세상을 품을 도량으로 한 시대 최고봉의 자리에 선 선인들의 마음속엔 언제나 청량산의 힘찬 기운과 아늑함이 채워져 있었을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