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월 중순 무더위가 막 시작할 무렵이면 들녘의 과일들이 단내를 풍기며 이고랑 저고랑에서 익어간다 . 골짜기 개울 속에서 개헤엄을 시작할 시기 , 그리고 시골아이들 뱃속도 허기에 자주 허덕여지는 때이다 .
요즘 같으면 ‘ 서리 ’ 했다고 하면 경찰서에 신고를 할 일이지만 , 60~70 년대의 인심은 그리 야박하지 않았다 . 물론 서리를 하는 사람들 역시 배부르면 그만인 줄 아는 , 그리 욕심내지 않던 시절이었다 . 내 어린 날 추억 중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부분도 바로 ‘ 서리 ’ 를 했던 기억이다 .
오늘은 내 오래전 ‘ 서리 ’ 의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해볼까 … .
지금은 한겨울에도 딸기가 나오고 , 한 여름에 꽁꽁 얼린 홍시 ( 연시 ) 를 맛 볼 수 있는 세상이다 . 참으로 좋은 세상이라고 해야 하나 , 시절 모르고 계절 모르는 주책이라고 해야 하나 , 아무튼 내 어린 시절 그때는 과일이 흔하지 않아 동네 여기저기 매달려 있는 설익은 과일도 달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 그날도 동네 아이들과 함께 폐타이어 튜브 하나 구해서 어깨에 둘러매고 개울가로 향하고 있었다 . 마을에서 저수지 개울까지는 아이들 걸음으로 40 여분은 족히 걸어야하는 꽤나 먼 거리였다 . 그 먼 길을 가는 동안 지나는 참외밭이며 수박밭이 몇 마지기나 되는지 다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
그늘 한 점 없는 신작로 뙤약볕 아래 , 새까맣게 그을린 우리들은 요즘처럼 자외선이 무엇인지 , 선크림이 뭔지도 모르고 남의 밭의 노랗게 익어가는 참외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 그러다 저 멀리 노르스름한 뭔가가 보이기만해도 우르르 달려들어 채 익지도 않은 참외를 따서 때 묻은 바지자락에 슥 문질러 입에 물고는 , 심봤다 (?) 는 마음으로 즐거워했다 .
입엔 풋내 나는 참외를 물고 , 손엔 길가에 핀 강아지풀을 한 움큼 쥐고서 일렬종대 행렬로 저수지를 향한다 . 저수지 개울물에 다다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벗고 물에 뛰어든다 . 수영을 배운 적도 , 제대로 본 적도 없지만 다들 나름의 수영 실력으로 개울 수영장을 누빈다 . 가끔 저수지의 깊이를 몰라 발을 헛디디면 , 물 밑에서 뭐가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쑥 내려가 물 먹는 일도 많았다 . 어린애들은 허우적이며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 하고나면 조금 큰 애들이 물에서 건져냈을 때 배가 불룩해져 있다 .
허우적이며 숨통을 틔우려 입을 벌리면 , 물이 한 바가지씩 입으로 들어가 채워진 탓이다 . 그 순간엔 놀란 마음에 울고 싶어도 배가 불러 울음이 안 나온다 . 울음보가 터지려 배에 힘이 들어가면 벌써 한 가득이던 배에 물이 , 입으로 꼬록꼬록 올라와 동네 아이들의 웃음보가 먼저 터져버린다 .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데 , 그때는 그런 걸 몰랐다 . 사실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 나 역시 물은 수차례 , 몇 리터를 마셨는지 모른다 . 그래도 좋았다 , 즐거웠다 .
한나절 동네아이들과 물놀이를 하고 나면 배가 고파온다 . 먹고 또 먹어도 배가 고프던 시절이라 우린 근처 산기슭 아래 복숭아밭으로 향했다 . 6 월 중순 , 복숭아가 익었을 리 만무하다 .
새파란 아직 영글지도 못한 복숭아를 따서 한 입 물면 얼마나 맛나게 느껴지던지 … . 어린 시절 추억의 맛과 기억이 다들 그러하겠지만 , 내게도 그 시절 그 시퍼런 복숭아 맛은 잊을 수가 없는 일이다 . 모든 일에 욕심이 화를 부른다고 했다 .
그냥 그렇게 복숭아 한두 개씩을 따먹고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 근데 다들 배고픈 참에 먹은 복숭아 맛에 홀려 몇 개씩 더 따가자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
홑겹 바지에 난닝구 ( 런닝셔츠 ) 하나 딸랑 입은 옷에 주머니가 있을 리 없고 모두들 셔츠를 바지 허리춤에 넣고 털복숭아를 따서 속옷셔츠 안 배에 담기 시작했다 .
난 신이 났다 . 왕할머니도 드리고 , 할머니도 드리고 , 엄마도 주고 , 오빠도 주고 등등 식구 수대로 하나씩만 담아도 내 러닝셔츠 안 배는 하나가득이었다 .
복숭아가 영글어 갈 무렵 , 복숭아 특유의 솜털은 유난히 많고 까슬까슬하다 . 연신 배를 부비고 가려워 긁으면서도 집에 가져가 식구들에게 줄 기쁨에 아이들은 싱글벙글 이다 .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
지천에 널려 있는 게 먹을거리인데 , 참외와 복숭아는 간식에 불과하다 . 털복숭아를 배에 안고 우리는 얕은 야산자락에 있는 감자밭으로 발길을 다시금 옮겼다 .
손과 돌을 이용해 밭 가장자리의 감자를 캐고 깔비 ( 땅에 떨어져 누렇게 변한 솔잎 ) 를 긁어모아 불을 지펴 감자를 익히기 시작한다 . 남의 집 감자밭고랑은 곧 우리의 식량 저장고인 셈이다 . 더운 여름날 불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 감자 익어가는 걸 지켜보며 두 손 모아 기다린다 . 배에는 털북숭이를 끌어안고 ,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다 타버린 감자를 입에 넣느라 온 얼굴은 껌정물 범벅이 되어도 누구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 , 그 시간을 즐기며 뛰어놀던 순수한 내 어린 동무와 나 .
하루 종일 이 밭 저 밭을 뛰어다니고 놀다보니 길었던 여름날의 해도 뒷산 너머로 기웃기웃 넘어가고 있었다 . 산등성이에서 보는 우리 마을의 저녁 풍경은 지금 생각해 보면 고즈넉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
집집마다의 굴뚝에서는 장작불의 하얀 연기구름이 뭉글뭉글 피어나고 , 마당에 줄을 매어 널어놓은 빨랫감을 걷느라 분주한 엄마의 모습도 멀찍이 보인다 . 마을의 정경이 눈앞에 보이면 아이들 모두 걸음을 재촉해 뛰기 시작한다 .
그리곤 엄마에게 자랑하듯 속옷 속에 숨겨왔던 복숭아를 풀어놓고 하루의 일과를 이야기해 준다 . 남의 집 물건을 마구 가져왔다고 야단도 맞지만 , 어린 내 성의에 복숭아 한입 물어보는 엄마의 모습에 난 마냥 기뻐했다 .
그런데 웬걸 ? 복숭아를 내려놓고 나니 온 몸에 들러붙은 복숭아털 때문에 가렵고 두드러기가 나는 게 아닌가 . 목욕을 하고 아무리 씻어도 때는 늦었다 .
이미 반나절을 끌어안고 있던 복숭아털로 인해 온 몸엔 두드러기가 나고 벌겋게 꽃이 피기 시작했다 . 설상가상으로 감자를 구워 먹느라 깔비를 주우러 다니면서 옻나무를 건드렸는지 두드러기는 얼굴까지 번져갔다.
‘ 때리는 누구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 고 했던가 , 옆에서 남의 물건 훔쳐서 벌 받은 거라고 놀려대는 오빠가 눈물 나도록 미웠다 . 밤새 잠 한잠을 못자고 긁고 또 긁고 ,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 본 내 모습은 처참했다 .
예전엔 병원보다 장독대의 된장독을 먼저 찾았다 . 할머니께서 밤새 가려움에 몸부림치는 내게 처방하신 된장은 얼굴부터 발끝까지 팩처럼 발라져 있고 , 옻이 전염될까봐 독방 아닌 독방신세까지 치르게 되었으니 처량하기 이를 때 없었다 .
며칠은 고생을 해야 나을 일이다 . 옻이 옮을 걱정에 친구들은 저 멀리 대문 앞에서 삐쭉이 쳐다보며 몇 마디 던지고 간다 . 감금생활 보름이 지나고야 난 풀려날 수 있었다 .
그 사이 동네 아이들은 밤새 서리한 참외며 수박을 의리 지킨다고 문 앞에 두고 가곤 했다 .
서리에도 나름의 철칙이 있다 .
첫째 , 낮엔 절대 좋은 물건에 손대지 마라 , 좋은 건 낮에 봐 두었다가 밤을 이용해라 . 그래야 주인에게 들켜도 풀려날 수 있다 .
둘째 , 한 장소를 한 달에 세 번 이상 가지마라 , 두 번도 많다 . 주인이 다 알고 집으로 찾아온다 .
셋째 , 가능하면 우리 동네가 아닌 옆 동네 밭을 노려라 . 혹여 들켜도 주인이 우리가 누군지 몰라 못 찾아온다 .
넷째 , 서리한 것들은 여럿이 나눠 먹어라 , 식구들 것도 꼭 챙겨라 . 혼자 독박 쓰고 돈 물어주는 일 없다 . 등등
이렇게 황당한 규칙을 정해 놓고 우린 참 많이도 다녔다 . 밤에 서리 맞은 주인 심정이야 어떠했을까마는 우린 매일매일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서리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라 더 아쉬움이 남겠지만 유독 내 기억엔 ‘ 서리 ’ 에 관한 그리움과 아쉬움 , 그리고 한 번쯤은 다시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