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제마을 골목길을 내려와 만나는 창신시장은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142-33에 있는 재래시장이다. 창신동 봉제 골목 밑에 자리 잡은 창신시장은 무허가 판자촌들이 들어서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시장이다. 창신시장은 중독성이 강한 매운 족발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창신동 봉제공장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중국식 양 꼬치, 인도와 네팔 요리 등 다양한 각국의 음식점들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창신시장은 주민들의 생활상과 봉제마을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창신동 골목길 안에 전태일 재단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방문을 거부했던 전태일 재단이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는 대한민국의 노동 인권과 민주주의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태일을 부를 때 흔히 ‘열사’나 ‘동지’호칭을 붙인다.
전태일은 누구인가. 그는 1948년 8월 26일 대구 남산동의 가난한 노동자인 전상수와 그의 부인 이소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가내수공업도 했으나 거듭 실패했다. 청소년 시절 아버지에게 재봉 일을 배웠으나 1964년 동생 전태삼을 데리고 서울 청계천으로 올라와 서울 평화시장의 의류 제조회사에서 시다로 일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로 서울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해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 한 잔 값이던 50원을 일당으로 받았다.
1968년에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뒤 해설서를 구입해 그 내용을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의로운 분노를 느끼고,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여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하고 설문을 통해 현재의 근로실태를 조사하였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에 따라 전태일은 삼동회 회원들을 이끌고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고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 등을 준비해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자본가들과 경찰의 방해로 플래카드를 빼앗기는 등 시위가 무위로 돌아가자, 전태일은 그날 오후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시장 앞길을 뛰어다녔다. 이때 전태일의 친구였던 이름 미상의 남자가 그에게 불을 붙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조영래는 1983년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며 이 남성의 이름을 김개남이라는 가명을 붙였다.
쓰러진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며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쓰러졌다.
11월 13일 혼수상태에 있었던 전태일은 그날 오후 10시 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의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분신 이후 평화시장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다른 공장들에도 노동조합 결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죽어간 사건은 노동계에 큰 영향을 주어 본격적인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71년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신민당은 노동 운동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고, 노동자 시위는 경찰과 정부의 탄압을 피해 신민당의 당사로 피신하였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사망 직전까지 청계천 노조 지원과 노동 운동 지원에 헌신하여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84년 서울에서 노동운동가들 중심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이후 전태일 재단이 조직되어 ‘전태일 문학상’,과 ‘전태일 노동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창신동 봉제 거리 박물관은 비탈길을 따라 낡은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있지만 1970-1980년대 옛 모습을 간직한 추억을 간직한 공간이다. 창신동에는 한양도성, 흥인지문, 단종과 정순왕후 관련 유적, 채석장 절개지 등 다양한 역사 문화자원이 많다.
또한 대학로, 이화동 벽화마을, 문구완구 시장,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등 주변 관광지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창신동 봉제 거리 박물관을 걸으며 마을 전체가 이야깃거리가 있는 박물관임을 실감한다.
창신동 봉제 거리 박물관에는 3천여 개의 봉제공장들이 들어차있다. 도시형 한옥, 개조된 판잣집, 다세대주택까지 다양한 집들 사이로 봉제공장들이 빼곡하다. 이 골목을 걸으면 그동안 잊고 있던 봉제기계 소리들이 따라온다.
창신동 길 낮은 지대 주변으로는 각종 부자재 점포와 패턴 작업장 그리고 패턴부터 미싱까지 도맡아 하는 종합공장들이 모여있다. 왼쪽으로는 한가지 공정만을 담당하는 소규모 작업장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아래 지대 종합공장의 일손을 돕는 낱 일 형태의 작업장이 이어져 있다. 창신동 길을 따라 높은 지대 성곽까지 한번 왔다 갔다 하면, 옷 한 벌이 하루 만에 만들어지는 마법 같은 곳이다. 봉제 거리 박물관의 골목길에서 봉제공장과 생활공간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창신동 봉제 골목은 평화시장 일대 봉제공장들이 창신동 안으로 진입하며 생겨난 골목이다. 19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평화시장의 봉제공장들이 더 이상 기존의 극단적 저임금 장시간 노동 체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대기업들도 기성복 시장에 뛰어들면서, 어려움에 처한 청계천 평화시장 일대의 봉제공장은 땅값이 싼 창신동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한때 2만 7천여 명에 달하는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노동자들이 창신동을 비롯한 인근 주택가의 작은 봉제공장 하청 노동자가 됐다. 그리고 이들이 지금은 동대문시장 의류를 주문 생산하는 하청 봉제공장의 안주인이 된 것이다.
197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 시절에는 사장과 직원이 섞이기 힘든 관계였으나, 지금과 같은 작은 규모의 창신동 봉제공장에서는 공장주와 미싱사, 미싱 시다가 모두 가족같이 지낸다. 봉제인들의 수가 줄다 보니,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뉴욕 패션 중심지로 주목받는 미트패킹 디스트릭트(Meatpacking District)는 창신동 봉제 거리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 미트패킹 디스트릭트는 고기 가공 공장이 모여 있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지금은 멋진 레스토랑과 옷 가게, 부티크, 호텔 등이 즐비한 관광지가 됐다. 정육점 바로 옆에 옷 가게가 들어서면서 이 마을이 패션타운으로 뜰 것이라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웃었을까. 창신동 봉제 거리 박물관은 이제 문화의 거리로 첫 발을 딛고 있다. 그리고 몇 년 후면 우리 앞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