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는 재독·재미 교포가 정착한 마을이 있다. 고국에서 따뜻한 정을 느끼며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조성된 정착촌은 독특한 건축양식이 주는 이국적인 풍경 때문에 남해의 관광 명소가 됐다.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독일마을은 빨간 지붕과 하얀색 벽, 예쁜 무늬의 창문 등 동화 속 그림 같은 집들이 보인다. 마을의 모습만 놓고 보면 유럽 속의 독일이다.
이곳은 1960∼1970년대 가난한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독일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근무하다 귀국한 독일 교포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머나먼 타지에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웠던 사람들이 노년에 조국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선택한 곳이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유럽풍 펜션과 커피숍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언덕을 반쯤 올라가자 카페 크란츠러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과로 휴식을 하며 바라본 주변 풍경이 아름답다. 아침을 먹고 온 멸치랑 칼치 식당도 눈에 들어왔다.
카페 크란츠러를 나와 독일마을 표지석을 따라 오른 전망대에는 시원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더불어 독일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독일마을 맨 위 전망대가 좀 더 멋스러웠으면 싶은 생각을 접어두고 바라본 풍경은 유럽 속 독일이다.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에 불과했던 1960년대 독일로 떠난 광부와 간호사 2만여 명의 파독 역사를 그려본다. 지하 100m 내려갈 때마다 지열이 5℃씩 올라간다. 지하 1200m에 위치한 막장은 지열이 60℃나 올라간다. 너무 더워 일을 못하니깐 바깥공기를 갱도 안으로 불어넣어 주는 송풍기가 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독일 광부로 간 사람들은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은 대한민국의 에리트였다. 독일 사람들은 덩치가 커 작은 갱도 안을 못 들어가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포복으로 들어갔다. 이같이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두려움을 모르고 일하다 보니 70여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그 당시 광부들은 600마르크, 4만 원을 월급으로 받았는데 그 돈의 전부를 가족을 위해 한국으로 송금했다. 8시간 근무 외 잔업을 신청해 받은 수당으로 근근이 현지 생활을 이어갔다. 1960~70년대 광부·간호사 파견을 담보로 독일로부터 받은 차관과 이들이 보내온 외화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가난한 나라의 아픔의 역사였다.
우리 집에서도 재독 간호사 대열에 합류할 뻔했다. 간호사였던 누나가 독일로 가려고 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나가지 못 했다. 지금 누나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독일에서 파독 광부·간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아픔이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독일마을은 김두관 남해군수가 독일에 파견됐던 교포들의 고국 정착을 돕고, 이국 문화를 경험하는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해 지난 2001년에 조성했다.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와 봉화리 일대 약 10만㎡ 부지이다. 남해군은 사업비 약 30억 원을 들여 40여 동의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 택지를 독일 교포들에게 분양하고 도로, 상하수도 등 기반 시설을 마련했다.
독일 교포들은 독일에서 직접 건축 자재를 가져와 몇 년에 걸쳐 전통 독일 양식으로 집을 지었다. 빨간 지붕과 하얀 벽으로 색깔을 통일해 마을의 상징으로 삼았다.
독일마을 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빨간색 지붕의 예쁜 집들이 남해 한려수도와 어우러져 풍경화 그 자체이다. 독일마을에서는 지난 2010년부터 매해 10월 뮌헨 옥토버페스트를 본뜬 맥주 축제가 열린다. 독일문화를 사람들과 공유하는 축제이다. 이 축제는 경상남도의 대표 축제로 선정되어 지난해에는 맥주축제 참가자만 8만여 명에 이르고 있어 큰 인기를 모았다.
아름다운 독일마을의 풍경에서 오는 멋스러움을 바라보며 남해의 부드러운 공기가 스며든다. 잘 다듬어진 골목마다 마주치는 이색적인 풍경과 꽃들의 모습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어우러지며 새로운 매력으로 빠져들고 있다. 한국 속의 유럽, 남해 독일 문화의 흐름 속에 오늘 이 풍경을 간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