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호 기자 ㅣ 미디어원
홍사익이라는 이름은 이미 꽤 알려져 있다. 조선 출신으로 일본 육군 중장까지 오른 유일한 인물이자, 해방 이듬해 전범으로 처형된 인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여러 차례 다큐멘터리와 칼럼의 소재가 됐다.
그런데 그를 둘러싼 이야기는 대개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차별받으면서도 끝까지 조선인임을 숨기지 않은 비운의 군인’이라는 서사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 충성을 다하고 항일 세력을 탄압한 친일 인물’이라는 서사다.
기록을 하나씩 대조해 보면, 두 서사 모두 절반만 맞다. 그리고 바로 그 절반씩의 사실이 한 사람 안에 동시에 들어 있었다는 게, 이 인물을 다루기 어렵게 만드는 진짜 이유다.
몰락한 양반가의 소년
홍사익은 경기도 안성 소촌에서 자작농 홍이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자료마다 다르다. 호적상으로는 1887년 2월 2일생, 묘비에는 1889년 3월 4일생으로 돼 있고 1890년생 설도 있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뿌리는 양반가였다. 조선 숙종 때 남인 붕당을 이끌었던 홍우원의 후손이었고, 명성황후 여동생의 아들과 사촌 처남 관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대에 이르러 집안은 사실상 농민으로 전락했다. 홍사익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스무 살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형 홍사용 손에 자랐다.
한학에 소양이 깊어 사서삼경을 통째로 외웠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과거를 통한 입신을 꿈꿨지만, 그가 소년이었을 때 과거제도 자체가 사라졌다. 족숙뻘 되는 대한제국 육군 장교 홍중유의 권유로 군인의 길을 택한 그는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사실상 해산되고 1909년 무관학교마저 폐교되자, 그는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오야마 묘지의 밤
1910년 10월 2일, 한일 합방 조약이 발효된 바로 그날 밤, 도쿄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생도들이 아오야마 묘지에 모였다. 홍사익과 훗날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는 지청천, 훗날 독립운동가가 되는 김광서, 그리고 이응준, 김석원 등이었다. 나라가 사라진 그날,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두고 밤새 논의했다.
누군가는 당장 자퇴하자고 했다. 하지만 홍사익은 아직 배울 것이 많으니 우선 배우고, 의무 복무 기간만 채운 뒤 그만두자고 제안했다. 회의는 그렇게 정리됐다 — 2년에서 4년의 의무 복무를 마치면 군을 떠나기로.
그런데 1914년과 1916년, 동기와 후배들이 하나둘 약속대로 군을 떠날 때 홍사익은 떠나지 않았다.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처음부터 일본군에 뼈를 묻을 생각이었던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적어도 스물세 살의 그는 ‘일단 배우고 나중에 그만두자’는 쪽이었다. 무엇이 그 계획을 바꿔놓았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시인이라 불린 생도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홍사익의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 1914년 졸업 당시 26기 전체 739명 중 22등. 조선인 동기 13명 가운데는 1위였다.
의외의 사실 하나는, 그가 사관학교 시절 주로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글재주가 뛰어나 그가 지은 작문과 시가 생도 자격으로 일본 천황 앞에서 낭독되기도 했고, 동기들은 그에게 ‘시인’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훗날 냉철한 참모 장교, 포로수용소 책임자로 역사에 남게 되는 이 사람이, 청년 시절에는 급우들 사이에서 시인으로 불렸다는 사실은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각지에서 조선인 학살이 벌어졌다. 홍사익의 가족도 은신처에 숨어 화를 피했다는 사실이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됐다. 제국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던 그조차,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걱정해야 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조선인의 문을 열어준 사람, 조선인을 협력시킨 사람
1920년 육군대학에 입학해 1923년 35기로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틀어 일본 육군대학에 들어간 조선인은 영친왕, 이건, 이우, 그리고 홍사익 — 단 네 명뿐이었다. 나머지 셋은 모두 왕족이었다. 왕족이 아닌 신분으로 이 코스를 밟은 조선인은 그가 유일했다.
이후 그의 경력에는 상반된 두 얼굴이 함께 나타난다.
1930년대 초 만주 육군중앙훈련처 교관으로 있으면서, 그는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청년들이 만주국군 장교가 될 수 있도록 입학 자격 제한을 직접 고쳤다. 원래 일본계·몽골계·만주계로만 열려 있던 문을 조선계에게도 열어준 것이다.
그런데 1934년 관동군사령부 참모부로 옮긴 뒤에는, 재만 조선인들을 일본 국민의 일부로서 만주국에 적극 협력하도록 조직하는 업무를 맡았다. 조선인의 기회를 넓혀준 사람과, 조선인의 협력을 관리한 사람이 같은 인물이었다.
이 무렵 그는 새 부대에 부임할 때마다 독특한 관행을 지켰다. 일본어와 조선어로 두 번씩 취임 인사를 한 것이다. 내용은 이랬다. ‘나는 조선인인 홍사익이다. 지금부터 천황폐하의 명령에 의해 지휘권을 가진다. 이의가 있는 자는 나오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 지휘권의 정당성은 정확히 천황에게서 끌어왔다.
‘협력하면 동등해진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진 뒤 상하이로 파견된 홍사익에게는 임무가 하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간 뒤라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맡은 임무 자체는 분명히 항일 세력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 시기 그가 반복해서 밝힌 신념이 있다. 조선인이 일본에 협력하면 나중에 정당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고, 일본인과 동등한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훗날 조선의 징병제 실시를 두고도 그는 이것이 일본 국민이 될 기회이자 천황을 위해 보국할 기회라는 취지의 주장을 논설로 펼쳤다.
이건 단순히 ‘떠나지 못해서 남았다’는 수동적 선택이 아니다. 협력이 조선인의 지위를 끌어올리는 길이라는, 나름의 논리를 가진 적극적 신념이었다.
태항산, 조선의용대와 마주치다
1941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홍사익은 중국 허베이성의 보병 제108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의 부대는 중국 팔로군과 여러 차례 교전했는데, 이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 산하에는 윤세주가 이끄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있었다.
1941년 12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팔로군과 함께 태항산맥의 호가장 전투와 형태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 전투로 조선의용대원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이 전사하고, 김세광과 김학철이 총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됐다. 이들과 교전한 일본군이 홍사익의 108여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다른 증언도 있다. 문인 백철은 훗날, 홍사익이 형태 지역 사령관으로 있을 때 그 지역의 조선인 이주민들이 오히려 그의 존재 덕에 일본인들에게 함부로 대접받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조선인 지휘관의 존재가 같은 지역 조선인들에게는 방패가 됐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지휘 아래,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전사하는 일과 조선인 이주민이 보호받는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이 모순을 어느 한쪽으로 정리하려는 순간, 거짓말이 시작된다.
세 번, 네 번 거절하다
1944년 필리핀 부임이 결정됐을 때, 매일신보 도쿄특파원 김을한이 그를 찾아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며 탈영을 제안했다. 홍사익은 거절했다. 그의 논리는 이랬다 — 자신이 배신하면 조선인 병사와 징용 노무자 수십만 명이 보복을 당할 수 있으니, 자기 한 사람을 생각해서 그런 경솔한 짓을 할 수 없다는 것.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과 참모장 이범석도 여단장 시절부터 계속 그에게 합류를 권했다. 그때마다 그는 같은 말로 거절했다. ‘나는 이 제복에 충성하고 싶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항복과 조선의 해방이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필리핀 산중에 있던 그의 부관은 조국의 독립을 축하한다고 인사했다. 홍사익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답했다. ‘나는 아직 제복을 입고 있다. 제복을 입고 있는 한, 나는 이 제복에 충성하고 싶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 안성으로 돌아가 중학교 교사로 조용히 살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재판, 침묵, 그리고 사형
일본 패전 뒤 홍사익은 필리핀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연합군 포로 학대의 책임을 물어 전범재판에 넘겨졌다. 그가 직접 포로를 죽이거나 학대한 혐의는 아니었다. 그의 지휘·감독 아래 있던 수용소에서 벌어진 학대에 대한 지휘책임이었다. 검찰이 제시한 107개 항목 가운데 84개가 유죄로 인정됐다.
법정에서 그는 자신을 조선인이라 밝히면서도 국적은 일본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그가 일본 국적으로 일본 육군대학을 나와 여단장까지 지낸 사람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고, 법정은 그를 일본군 고급 지휘관으로 판단했다. 체포 직후 일본 국적을 포기하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도 그는 거절했다.
재판 내내 그는 길게 변명하지 않았다. 무죄를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거나 정치적 변론을 늘어놓지 않았다. 항소도 포기했다.
마지막 농담, 그리고 시편 51편
1946년 9월 26일, 홍사익은 마닐라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형이 확정됐을 때 그는 ‘나는 갑종에 합격했다’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일본어로 징병 신체검사 최우수 등급을 뜻하는 ‘갑종합격’과 ‘교수형 집행 대상자’를 뜻하는 표현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을 이용한 자조적인 농담이었다는 것이다. 통역을 통해 뜻을 알게 된 미군 군법무관들이 놀랐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처형 직전 그가 참관인들에게 부탁한 것은 구약성서 시편 51편의 낭송이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로 시작해 정결한 마음을 구하는 참회의 시편이다. 그가 무엇을 뉘우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마지막으로 고른 텍스트가 참회의 언어였다는 사실만은 남는다.
그의 유고 — 진중에서 쓴 시와 수필, 기행문 — 는 일본군을 미화할 수 있다는 이유로 연합군에 의해 모두 압수돼 불태워졌다. 유해는 다른 일본군 협력자들과 함께 화장돼 미군에 의해 바다에 뿌려졌다.
죽은 뒤에도 갈라진 평가
1966년 그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2008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2009년에는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한국에서 그의 가족이 받은 대접은 냉담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유독 미워했다고 전해지며, 아들 홍국선이 한국은행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직접 파면을 지시했다고 한다. 둘째 부인 이청영은 ‘친일파 가족’이라는 주변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미국행을 결심했지만 여비가 없어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에게 편지를 보냈고, 요시다가 사비로 돈을 보내 겨우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반면 1980년대 들어 언론인 송건호는 그를 다시 조명하며, 그에 대한 비판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이 조선인을 ‘반도인’이라 부르며 노골적으로 무시하던 시절, 같은 민족이 중장까지 오른 것 자체가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민족적 자긍심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기에 그를 보던 눈과 해방 후에 그를 평가하는 눈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게 송건호의 지적이었다.
아들에게 남긴 답
그의 생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전쟁터가 아니라 집 안에 있다.
아들 홍국선이 중고등학생 시절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이유 없는 멸시와 따돌림을 당하고 괴로워하며 물었다. 왜 우리는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고. 홍사익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이건 쉽게 풀릴 문제가 아니며, 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와 비슷한 데가 있다고. 그러니 아일랜드인이 영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든 결코 자신이 아일랜드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듯, 너도 언제나 스스로를 조선 사람이라 밝히라고.
이 대답에는 그가 평생 유지했던 태도가 압축돼 있다. 차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체성을 감추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체제 자체에 맞서 싸우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정체성을 지키면서 체제 안에서 인정받는 것, 그것이 그가 아들에게, 그리고 아마도 스스로에게 제시한 답이었다.
그래서 홍사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질문에 서둘러 답할 필요는 없다.
그는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긴 적이 없다.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새 부대에 갈 때마다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혔고, 아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다.
동시에 그는 임시정부 요인을 추적했고, 재만 조선인의 만주국 협력을 조직했고, 조선의용대와 교전한 부대를 지휘했으며, 협력이 조선인의 권리를 얻는 길이라고 믿고 그렇게 말했다. 광복군의 거듭된 권유를 세 번 이상 거절했고, 조국이 해방된 순간에도 ‘나는 아직 제복을 입고 있다’고 답했다.
이 두 사실은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 둘 다 참이었다.
그는 자서전을 남기지 않았다. 이 모순을 스스로 어떻게 정리했는지 설명하는 긴 글도 남기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가 실제로 한 말과 행동뿐이다 — 아일랜드인의 비유로 아들을 다독인 아버지, 협력이 곧 권리라고 믿었던 장교, 세 번의 권유를 모두 거절한 지휘관, 그리고 처형대에서 참회의 시편을 청한 사람.
이 조각들을 하나의 인격으로 조립하는 일은, 지금 우리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그 조각 하나라도 지우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홍사익이 아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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