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 오지 히말라야의 칼바람을 맞으며 신을 숭배하고 , 종교적 믿음에 환생을 기원하는 이들이 살아가는 곳이 있다 . 티베트인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높은 곳 , 신들의 언덕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코나 ( 순례 ) 를 한다 . 신을 향한 기도와 고행은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고지대에서도 하염없이 오체투지 ( 삼보일배 ) 를 행하며 이어진다 .
티베트에서의 종교는 사원이나 사당에 국한되지 않고 곳곳에 산재해 있다 . 먹고 마시고 숨쉬는 것 자체가 종교이고 , 내세를 위한 고행의 연속인 것이다 .
종교와 신앙의 의미가 희석되어가고 현재의 삶이 전부가 되어가면서 티베트는 히말라야만큼이나 이 세상의 오지가 되어 사람들에게 신비로움을 , 경이로움을 안겨주고 있다 .
티베트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닌 삶이요 , 전생의 악업을 끊기 위한 속죄의 고행이며 내세의 유복한 환생을 위한 현세의 기도이고 신과 소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 문명의 오지를 찾아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어디인지 한번쯤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 .
티베트 대초원에서 만난 부처
티베트의 대평원 라싸초원을 가로지르며 티베트 유목민들의 미소 속에서 보살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평온의 미소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경계와 호기심의 눈빛으로 다가선 나를 부끄럽게 한다 .
나무 한그루 , 풀 한포기 조차 쉽사리 허락지 않은 이 메마르고 삭막한 대지에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미소가 생겼을까 , 이게 티베트 불교의 의미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진다 .
야크 떼를 모는 아이들의 볼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태양빛 아래 그을려 붉게 상기되어 있고 , 길 떠난 나그네를 향해 수유차 한잔을 내미는 유목민 여인의 손은 거북이 등껍질마냥 갈라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
오염되지 않은 하늘과 공기 , 그 가운데 내려앉은 석양은 기암괴석의 절경을 이룬 대자연의 장대함과는 사뭇 다르다 .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기암절벽을 이룬 장엄한 산에 대한 탄성과 달리 그저 대지의 여신 앞에 경외하듯 조아리게 된다 .
티베트의 광활한 초원은 진흙탕의 웅덩이가 이어지는가 하면 암석 골짜기 계곡이 나오고 , 곳곳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인해 시냇물이 여기저기 흐르고 있다 . 신은 그들의 땅을 비옥한 토지 대신 고행의 땅으로 세우셨으니 티베트인들의 삶은 신이 허락하신 대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가졌나보다 .
이 초원에서도 오체투지를 하며 진흙탕 속에 몸을 던지고 돌부리에 몸이 상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 오직 그들의 신만을 위한 코나를 행하는 순례자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
내 눈에 비친 그곳의 사람들은 아이도 , 목동도 , 순례자도 그리고 수줍게 여행객들을 향해 미소 지어주는 여인들도 모두 부처였고 , 보살이었다 .
신께서 주신 오늘의 하루를 선물이라 여기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삶일지라도 행복하다 말하는 사람들 , 매일 매일이 행복으로 충만하다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티베트인들이다 . 자연에 순응하며 오로지 신을 향한 , 내세를 위한 절대적 삶만을 살아가는 이들이야 말로 소남 ( 영적 경지 ) 에 이른 수도자일 것이다 .
라싸에서 찾은 달라이 라마
티베트인들이 가장 신성시 하는 곳 , 라싸의 상징물인 포탈라궁과 죠캉사원은 티베트 불교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 라싸 시가지 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포탈라궁은 그 위용과 아름다움으로 여행객들에게 벅찬 감동으로 다가선다 . 라싸 시내 한가운데 , 하늘아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포탈라궁은 내세를 위한 현세의 고행을 감내하며 신을 향해 끝없이 기원하는 중생들을 굽어보고 있다 .
‘ 포탈라 ’ 라는 이름은 산크리스트어의 포탈라카 (Potalaca: 관음보살이 사는 산 ) 에서 유래되었다 . 7 세기 라싸 지방의 관음보살을 모신 ‘ 파쿠파 라칸 ’ 이 처음 건립되고 , 수십 수백 년의 기간 동안 계속 건축되면서 지금의 포탈라궁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
정면에서 바라본 포탈라궁의 독특한 양식과 조형적인 아름다움 , 티베트 불교 고유의 현란한 색채 , 이모든 것이 고산지대 에메랄드빛 하늘과 함께 천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그러나 포탈라궁으로 향하는 높은 계단은 또 다른 고행의 시작이다 . 저지대에 비해 63% 밖에 되지 않는 라싸의 산소량은 가만히 서 있는 이에게도 숨통이 조여오고 어지러운 고산증을 앓게 한다 .
포탈라궁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신에게 한걸음씩 다가간다는 마음과 신에게 소원하는 것들을 가슴에 품고 경건한 마음으로 올라야 할 것 같다 .
포탈라궁의 1000 여개의 방 중 여행객들에게 공개된 곳은 백궁과 홍궁이다 . 홍궁은 종교적 업무를 관장하던 곳이고 , 백궁은 달라이 라마의 생활공간과 행정 업무를 집행하던 곳이다 . 약 300 년간 포탈라궁은 티베트의 정치 , 종교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 그러나 지금은 인도의 다람살라에 망명중인 14 대 달라이 라마가 떠남으로서 주인은 잃고 객들만이 드나드는 비운의 궁전이 되어 있다 .
또 하나의 상징인 죠캉사원은 7 세기 중반 토번의 왕 손첸 간포의 왕비에 의해 창건된 사원이다 . 티벳인들에게 가장 신성한 성지로 ‘ 죠캉 ’ 은 ‘ 부처의 집 ’ 을 의미하고 있다 .
죠캉사원은 티벳 최초의 목조 건축물로 약 1300 여 년의 세월을 티벳인들의 성지로 자리하고 있다 . 특이하게 이 사원은 네팔과 인도의 건축양식을 따랐으며 , 일반적 사원의 방향인 남향이 아닌 서향으로 지어져 있다 .
이는 왕비의 고향인 네팔을 향하기 때문이라니 , 고향을 그리는 애절한 마음은 신을 섬기는 절대적 삶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
신이 살고 있는 산 , 카일라스 ( 수미산 )
순수함과 초자연의 신비가 살아 숨 쉬는 땅에 신이 살고 있는 성스러운 산이 있다 . 인간과 자연과 신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그곳을 향해 순례자의 여정을 밟는다 .
히말라야와 평행선에 있는 카일라스는 해발 6714m 로 일 년 내내 눈으로 덮여 만연설의 신비로움을 안고 있다 . 카일라스 , ‘ 눈의 보석 ’ 이란 의미와 산티크리스트어로는 ‘ 신의 천당 ’ 으로 의미되며 , 불경에서는 우주의 중심 혹은 우주의 연꽃등으로 지칭된다 .
티베트에서는 카일라스산을 수미산이라 부르고 티베트 불교 수행자들이 일생에 꼭 한번은 다녀와야 하는 곳이라 생각한다 . 피라미드 모양의 바위산이 주산인 카일라스산을 대면하면서 신의 존재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
만연설로 뒤덮인 카일라스산에 휘몰아치는 칼바람은 신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 경이롭고 신비로운 눈보라를 일으켜 흩날린다 . 대자연의 웅장함과 인간의 순수한 열정이 이 먼 곳 오지에 신이 살아있는 산 , 수미산을 만들었다 .
카일라스 주산을 제외하고도 주변산세와 언저리는 바위와 돌들로 이루어져 있다 . 수천 년 세월의 풍우에 깎이고 쪼개어져 수없이 흘러내리는 돌들과 모래 . 입산이 허락된 수미산 주변의 52 ㎞ 를 코라 즉 오체투지를 하며 순례하는 이들은 자신을 그 모래의 한 알갱이에 비유하며 한걸음씩 신에게 다가가고 있다 .
가난을 불행하다 여기지 않고 고행을 신에게 다가가는 축복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티벳인들에게 사람들의 손에 들여진 카메라는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 그보다 그들의 손에서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 마니통 ’ 과 그를 돌리는 이의 얼굴에 묻어있는 행복한 미소는 우리에게 무소유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
물질적 삶에 집착하지 않고 , 삶의 조건이나 불편함을 장애로 생각하지 않는 그들의 삶 자체가 무소유에 대한 답이 아닐까 … . 티베트를 떠나기 전 , 이들의 삶을 닮고자 타루쵸 ( 바람의 말 ) 가 전하는 세계인들의 소원을 위해 궁따 ( 오방색 기도문 ) 를 걸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