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꿈꾸는 빛의 여행자 ‘김중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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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에서 처음 그를 보았다. 유명 카메라 광고모델로 나온 그가 한쪽 벽을 다 채운 커다란 광고판에서 행인들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레게 머리를 하고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던 그의 눈이 궁금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청담동 스튜디오 ‘벨벳언더그라운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작품활동과 전시회 준비로 여유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허락된 인터뷰는 그의 주문대로 특별한 무엇을 만들어야 했다. 사진과 글 모두 그를 상징적으로 보여줄수 있는 아이콘이 필요했다. 하지만 두시간만에 그가 작업해 온 35년의 시간을 담아낼 수는 없었다. 결국 다섯 개의 주제로 압축된 파일이 나왔다. 각각의 파일은 통조림처럼 상당히 많은 내용물을 함축하고 있다. 지나온 추억과 사진에 대한 그의 생각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이 들어있는 상당히 무거운 통조림이다.

Luminous
스튜디오 안은 아프리카를 닮았다. 가지가 많은 커다란 나무와 새들, 빠른 템포의 음악,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장신구와 가면, 얼룩무늬 카펫 등은 레게머리의 주인과 잘 어울렸다. 제한된 시간이라 표지 촬영을 먼저 했다. 그는 꽤 오래된 대형 카메라 앞에서 직접 작업하는 포즈를 취해 주었다. 세계적인 사진작가 ‘김중만’이 카메라 앞에 서 있는 모습은 신선했다.

그는 마치 거울에서 자신을 보듯 자연스러웠다. 사진기자가 조명을 준비하자 한마디 툭 던진다. “생으로 가자” 창을 통해 들어 온 자연의 빛으로 자연스럽게 찍자는 말이었다. 촬영이 진행 될수록 누가 누구를 찍는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이번엔 내 팔만 찍어줘” 그의 오른 팔을 보자 ‘Luminous’라고 새겨진 타투가 선명하다. 카메라를 든 손으로부터 ‘Luminous’가 새겨진 팔까지는 오래전부터 하나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가 왜 저런 포즈를 보여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주문을 해보기는’ 그러면서 ‘알지만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는데 손해가 많더라. 이제는 조금씩 아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는 촬영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주었다.

인터뷰는 미리 준비해 간 다섯 개의 주제(1.인연 또는 운명-프랑스 니스에 있는 국립응용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가 사진을 하게 된 동기, 2.차이-사진과 그림, 3.변화-시기별 작업의 변화, 4.회상 – 부친에 대한 추억과 관계, 5.자유와 꿈)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Fate
어릴 때 꿈은 소설가였어. 초등학교 5학년 때 로빈슨 크루소의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 탐험소설을 쓰고 싶었거든. 그렇게 꿈을 키우고 있던 어느 날 나에게 기적이 일어난거야. 아버지께서 나를 데리고 아프리카로 가신거지. 그 때는 정말 좋았어. 드디어 내 꿈을 이룰 수가 있겠구나. 그런데 막상 아프리카에 도착해 보니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르잖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사막 밖에 없었어. 정글과 타잔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어린시절 꿈은 그렇게 사라졌지.

그 후 나는 혼자서 프랑스 유학을 떠났어. 아프리카에서 꿈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길을 떠난 것인지 잘 모르겠어. 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와서 막연하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미술대학에 들어갔고 서양화를 전공했지. 사진을 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이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운명같기도 하지만. 어느 날 암실을 갖고 있는 친구 집에 갔는데 놀라운 사실을 알았어. 친구를 따라 들어간 암실에서 하얀 인화지에 사진이 입혀져서 5분만에 나온거야.

그걸 보는 순간 머리를 때리는 충격을 받았어. 그림은 몇 개월에 걸려서 겨우 하나 나올까 말까 한데 사진은 불과 몇 분만에 한 장이 나오잖아. 지금은 디지털카메라가 나와서 찍은 즉시 나오지만 말야. 그 일은 내 인생의 반환점을 마련해 준 중요한 사건이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35년 동안 사진을 하고 있으니까.

Difference
사진과 그림의 차이는 공통점도 있지만 다른 점이 더 많아. 그림은 크리에티브한 세계지만 사진은 리얼리즘이 중요시되는 세계야. 내 영혼이 사진을 통해서 한 꺼풀 덧 입혀지면서 새로운 체험을 하게되지. 실내에서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제약이 많지만 기본제품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그림보다는 훨씬 간단해. 물론 시각적인 분야는 같지만 수 천 년 된 그림과 불과 2백년도 안된 사진은 차이가 많다고 봐야지.

하지만 그림과 사진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그림은 작가의 상상력이 무척 중요하지만 사진은 보이는 피사체가 전부야. 그렇다고 사진이 눈에 보이는 것만 담지는 않아. 여기에 사진의 매력이 있거든. 내가 못 보았던 것을 인화된 사진 속에서 찾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때마다 신기하고 놀라워. 언젠가 인터뷰에서 말했지만 로스앤젤레스의 피코(PICO)가에서 사진을 찍은 적이 있어. 아주 오래전이지.

내가 찍은 것은 아무 의미없이 거리에 방치된 채 사람들의 발에 치이는 작은 돌멩이였어. 그런데 사진을 인화하자 그 배경으로 잡힌 초점 잃은 뿌연 화면 속에 도로가 보이고, 그 끝에 태평양이 이어져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 된거야. 그게 나한테 두 번째로 가져다 준 충격이었어. 사진은 그림에서 볼 수 없는 사물에 대한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아.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해.

Transition
사진을 처음배우고 작업할 때는 나를 버리지 못했어. 대학에서 배운 그림에 대한 지식과 습관을 그대로 적용했거든. 사진을 찍을 때 머릿속에 모든 것을 생각했어. 붓과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 모든 작업을 스케치 하고나서 촬영했거든. 나한테 사진은 캔버스 대신 필름을 이용한 작업이었어.

그렇게 10년 동안 하다가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된 사건이 있었지. 여름에 일본의 호텔 수영장에서 아주 우연히 벌어진 일이야. 수영장의 갈라진 틈 사이 들꽃 같은 게 피어 있는데 너무 아름답잖아. 순간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이 댔어. 그때까지 나는 머릿속에서 생각한 사진 외에는 찍지 않았는데 말야. 그 날 많은 것을 생각했어. 그리고 결심했지.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찍은 사진 말고 기록적인 사진 다큐적인 사진을 찍기로…

꼭 10년 만에 내 사진이 변한 것이지. 처음엔 암실처럼 어둠에서 시작된 사진이었다면 10년 후부터는 빛과 함께 시작된 사진이라고 할 수 있어. 그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형태는 계속 진화했지. 처음 10년은 어둠을 주제로 한 사진을 했기 때문에 가난했어. 작품이 하나도 팔리지 않았거든. 생각해봐 고독과 방황, 공허감, 바람이나 돌 등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사진으로 만들었으니 그걸 누가 걸어 놓겠어. 누군가 그러는 거야 내 사진은 너무나 우울하고 어두워서 걸어놓고 보기가 힘들데. 그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좋아했어.

잘 팔리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로 좋아했거든. 내 작품은 안 팔릴수록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 거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내 삶의 중심이 어둠이었던거야. 그래서 사진도 주인을 닮았던 거고. 한국에 왔을 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한 적이 있어. 거기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돼. 그 정신병원에서 80명과 함께 살았는데 그들 모두 갇혀 있는 것에 대해 나처럼 답답해하지 않는 거야. 그 사실이 너무 신기했어.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그 이유를 알겠더라고. 그들이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데도 적응하는 것은 그들에게 내일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그 때 알았어. 자유보다 내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그 때의 소중한 체험이 나에게 내일을 꿈꾸는 자유인의 삶을 요구했는지도 모르겠어.

정신병원 이후 나는 ‘나에게 내일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어둠에서 밝음으로 진화하게 되었지. 그래서 사막의 아름다움과 꽃, 아프리카의 밝음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어.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지금은 새로이 낮음과 높음을 극과 극을 쫓고 있어. 여기서 낮음은 사막이고 높음은 히말라야지. 올해 히말라야에 오를 계획이야. 지금까지 내 사진들은 필연과 우연, 어둠과 밝음 낮음과 높음 등 극과 극을 관통하고 있다고 보면 돼.

그동안의 작업을 통해서 나는 사진이 다른 장르에 비해서 모든 대상의 최전방에 서있다고 믿어. 그것은 진실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 있다는 말이지. 지금까지 작업한 사진가 중 죽을 때까지 최전방에서 사진을 찍은 이는 로버트 카파야. 카파가 생존해 있을 때만해도 사진가들은 최전방에서 작업을 했는데 지금은 광고사진이나 패션사진 같이 계획된 틀 속에서 광고주가 원하는 사진을 만들기에 바쁜 거 같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모든 게 무의미해지고 있어서 안타까워. 그럴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Reflection
부친에 대한 기억은 아프리카와 지독히 가난했다는 것 그리고 항상 환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 정도야. 그땐 몰랐는데 아버지는 나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아. 그래서 나도 아프리카에서 아이들에게 내가 하는 일을 보여준 적이 있어. 그런데 내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나와서 수정을 하게 되었어.

아내와 아이들이 내가 동물들 가까이 접근하자 크게 놀란거야. 나만 생각하고 행동한 꼴이 된 거지. 그들에게 내 행동은 숨통을 조이는 작업이었던 것을 뒤늦게 알고 그만두었어. 대신 60이 넘어서 나 혼자 고비사막을 갈 거야. 어릴 때 가졌던 꿈을 이루고 싶거든. 탐험소설가말야. 재밌을 거 같아.

아버지도 가난했지만 나 역시 가난을 극복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 스튜디오도 35년 동안 작업하면서 7년 전에 갖게 되었어. 뒤늦게 가장으로서 책임도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어. 그것으로 끝이야. 나는 2000년부터 가족을 생각하게 되었어. 하지만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자유본능을 억제 할 수는 없어.

돈을 생각하면 자꾸 채워야 하니까 내안의 자유는 사라지고 말거든. 이기적이라고? 맞아. 그래도 나는 알려진 것 외에 덜 알려진 것 내가 알리지 않은 것들이 더 많아. 빙산과 같은 거지. NGO단체에서 네팔에 가자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한적이 있었어.
아이들을 싫어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거절했는데 그 해 나한테 너무나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긴거야. 그렇게 받다보니 나도 누군가에게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 때 아버지를 생각했어. 아버지는 평생 의술로 베풀면서 살다가 돌아가셨거든.

나도 사진으로 아버지처럼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든 거야. 결국 아버지가 보여준 힘에 의해 네팔에 가서 AIDS에 걸린 채 태어난 아이들의 사진을 찍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런 일들이 너무나 의미 있다는 것을 느꼈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해마다 실천하고 있어. 지금까지 했던 많은 전시들이 그래.
전시를 통해 판매된 수익금 전액을 기증하기로 했거든. 사진가로서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과 자연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즐거워.

이제야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가난한 외과의사였지만 마음은 항상 부자였거든. 평생을 봉사하느라 자식은 돌보지 않았지만 원망은 없어. 대신 그런 아버지 옆에서 평생을 함께 하신 어머니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가족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아프리카에서 샌드위치 장사를 했거든. 나도 신이나서 거들었던 기억이 나. 아버지는 다른 것은 몰라도 진정한 휴머니스트였고 의사로서 치열하게 사셨어.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생전 처음으로 병수발을 했어. 목욕도 시켜드리고 그랬지. 그 때를 생각하면 정말 감사해. 돌아가시기전에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한테 그러는 거야 통장에 2000불이 들어있는데 그것으로 괜찮냐고. 그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2000불이 2000만불쯤 되는 것 같았어.왜 그렇게 기쁘던지. 2천불의 가치가 나에겐 세상의 가치로 따질 수 없는 사랑으로 느껴진거야.

Freedom & Dream
처음에 내가 사진기자에게 위에서 찍으라고 했잖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어. 나는 알고 있지만 모르고 있어야 상대방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모든 게 그랬어. 채우는 작업보다 비우는 작업을 많이 했고 사진은 특히 비울수록 더 많은 작품을 할 수 있어.

사진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물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해. 나아가 철학과 관점도 있다면 다른 예술과도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을 거야. 나는 지금까지 나와 다른 것을 찾는 작업을 해온 거 것 같아. 모르고 보고 만나면 내가 개입 안 되니까 더 진실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거든. 알지만 모른다는 말은 내 작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어.

세상의 기준으로는 지위가 높고 스타지만 나한테는 그냥 인간일 뿐이지. 반대로 병들고 가난하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도 똑같은 인간이야. 나에게 그들을 구분하는 경계는 없어. 마찬가지로 자유와 꿈도 분리 할 수 없는 거야. 인간이기에 조금은 자유롭고 조금은 꿈을 갖고 싶지만 어느 하나에 구속되면 나머지를 잃어버리지. 개인적으로 자유를 얻기 전에 꿈이 먼저가 아닐까 생각해.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꿈꾸는 거 아닐까. 패러독스같지만 그게 현실이잖아. 지금까지 겉으로 보는 김중만은 자유인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해. 해마다 2만컷 정도 촬영했으니까 그동안 40만 컷이상은 족히 되는 것 같아. 그중 내가 아는 컷은 겨우 200여장 밖에 몰라. 찍는 것 그게 뭐나면 나에게 자유야.

하지만 꿈은 그렇지 않아. 몽환적이고 막연하고 그런 거야. 신분상승이나 엄청난 부를 가지는 것은 꿈이 아냐. 난 한 번도 최고를 꿈꾼 적이 없어. 오직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지. 진짜 꿈은 사진만 찍으면서도 놀고 먹을 수 있는게 아닐까? 퇴폐적이고 이기적이지. 결국 자유로워지려면 들어와야 해. 주변에서 맴돌면 절대 경험할 수 없어.

자유는 직업 들어와서 느끼고 봐야하는 거야. 지금의 나는 과거보다 훨씬 자유롭다고 생각해. 원하는 카메라와 원하는 작업 그리고 내 삶의 중심에 사진이 있어서 너무 좋아. 사진을 위해서 나는 절제하게 되고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되지만 행복해. 이쯤되면 나는 행운아가 아닐까.

후배들한테 하고 싶은 말은 사진작업은 다른 장르에 비해 생산량이 많은 활동이야. 하지만 500장 중에 1장만 건지게 되더라도 나머지 499장의 실패작을 심장에 담아야 해. 절대 그것을 버리고 포기하고 그러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어. 열정이 식는 이유도 다 거기에 있다고 봐.

내가 생각한 것 의도한 것이 안나와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포로세스를 이해하고 극복하는 노력을 해야 해. 그리고 세상은 있는 그대로 담아야 해. 내 주위에 사진 작업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질수록 너무 좋아. 그만큼 세상을 아름답게 보여줄 수 있으니까.

사진작가 김중만의 얘기를 들으면서 장 그르니에의 섬이 떠올랐다. 그르니에는 꿈 속에서 여행을 했다. 그가 좀 더 잘 꿈꾸기 위해서 여행을 한 것처럼 김중만도 꿈을 꾸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가 더 많은 사진을 찍을수록 꿈은 더 많은 여행을 허락할 것이다.

홀로 서 있는 섬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처럼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속삭이는 그 무엇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마치 어둠 속에 깊이 박혀 있는 가시처럼 그에게 아픔을 주는, 그 아픔이 하나의 빛으로 변해 새로운 꿈이 되는 그 무엇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