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교육의 장, 용인관광이 더 즐거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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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관광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이들과 나들이에 최적의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
리트머스 종이가 잉크를 빨아 들이 듯 아이들은 여행에서 만난 새로운 사물과 부모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내내 기억할 것이다 .
사랑스런 아이들과 함께하는 용인관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포은 정몽주의 묘소이다 . 충절의 상징인 포은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아이들을 옛적 조선 개국의 시대로 데려가 줄 것이다 .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포은을 만난다면 기쁨은 더욱 배가 된다. 어 릴 적 배운 많은 것들 중 포은의 시조,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는 여전히 기억에 또렷하기에 그를 만나는 것은 노년의 큰 즐거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 이런들 엇더이미지며 져런들 엇더이미지료
만수산 ( 萬壽山 )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이미지리
우리도 이이미지치 얼거져 백년 ( 百年 ) 이미지지 누리이라 ."

새로운 왕조를 꿈꾸며 혁명을 꾀하던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 ( 李芳遠 ) 은 포은 ( 圃隱 ) 정몽주에게 ‘ 하여가 ( 何如歌 )’ 로 회유의 뜻을 전하니 포은은 ‘ 단심가 ( 丹心歌 ) 로써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의 뜻을 전한다 . 지략적인 정치가는 얽힘의 논리로 화합을 권유하고 대학자는 죽음의 논리로 단절과 의지를 표현한다 .

이몸이 죽어죽어 일백번 ( 一百番 ) 곳쳐죽어
백골 ( 白骨 ) 이 진토 ( 塵土 ) 되여 넉시라도 잇고업고
님향 ( 향 ) 일편단심 ( 一片丹心 ) 이야 가 줄이 이시라 .


포은선생의 묘소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 3 에 위치하고 있다 .
경북 영천이 고향이신 포은선생의 묘소를 천장하기 위해 개성 풍덕에서 모시고 가던 중 묘역 근처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 명정이 날아올라 지금의 묘역에 내려앉으니 이를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이 곳에 묘를 모셨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선죽교에 붉은 핏자국을 남기고 돌아가신 포은 선생은 후일 충효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

예로부터 ‘ 생거진천 사거용인 ( 生居鎭川 死居龍仁 ,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 )’ 이라는 이라는 말이 전한다 . 그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용인이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기에 홍수나 폭우로 인한 무덤 유실을 걱정할 필요가 적고 한양도성과 지척이니 묘자리 삼기에 제격이니 사거용인 ( 死居龍仁 ) 에 시시비비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
포은 선생의 묘소는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원을 능가하는 명당자리에 웅장한 규모로 조성되어있다 .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이들이 반드시 찾아 지세를 살펴봐야 하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알려져 있다 .

선생의 삶은 KBS 사극 ‘ 정도전 ’ 을 비롯한 유명 역사드라마를 통해 더욱 널리 알려졌다 . 포은선생의 님 향한 일편단심은 700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있다 .

오늘날 포은 선생의 묘소는 그의 뜻을 되새기고 삶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참배객들이 끊이지를 않으니 그의 삶은 1000 년을 넘어 더욱 길게 이어 질 것이다 .
고려수문하시중 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겨진 포은선생의 묘지석은 1571년 중종 때 조광조와 성균관 유생들이 세웠다고 한다.
포은 선생의 묘소, 웅장한 무덤은 곡담으로 둘러 쌓여있고 여러 조형물들이 선생을 모시고 있다.
포은 선생의 묘제사를 지내기 위해 후손들이 1636년에 건립한 영모제.1980년에 보수를 위해 해체되었으며, 1995년에 중수되었다. 재실(齋室)과 고직사(庫直舍)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며, '강당(講堂)'이라고 적힌 편액(扁額)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제사 기능 외에 학문을 위한 장소로도 이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포은 정몽주(13371392) 고려의 정치가, 학자. 초명(初名)은 몽란(夢蘭)ㆍ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고려 말기 새로운 이념으로서 주자학을 확립한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이념에 대치되는 주자학의 연구와 보급에 힘썼으나, 온건개량파의 입장을 견지하여, 조준, 정도전 등의 급진적인 개혁에는 반대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였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포은 정몽주의 업적과 높은 학식을 기리기 위해 신도비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