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국가의 기준이 무너질때 ① ‘민중의 지지’라는 말은 왜 검증될 수 없는가

[미디어원=이정찬 기자]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문장은 오래된 구호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도, 냉전의 격랑 속에서도, 그리고 오늘날 소셜미디어의 시대에도 반복된다. 이 말이 자주 쓰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듣기에는 정의롭고, 즉각적이며, 반론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와 정치에서 ‘민중의 지지’는 대개 증명되는 사실이 아니라 선언되는 권위였다. 이 표현이 왜 위험한지, 그리고 왜 지금 같은 시기에 더욱 경계해야 하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민중’은 누가 규정하는가

‘국민’은 법적 개념이다. 국적, 선거권, 권리와 의무가 제도 안에서 확인된다. 반면 ‘민중’은 대체로 법적 주체가 아니라 도덕적 상징으로 등장한다. 문제는 이 상징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는 데 있다. “민중”은 때로 노동자와 농민을 뜻하고, 때로는 거리의 군중을 뜻하며, 어떤 경우에는 그저 ‘우리 편’의 도덕적 얼굴이 된다.

이렇게 정의되지 않은 집단을 내세우면, 누가 포함되고 누가 제외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생략할 수 있다. 그 결과 “민중의 지지”는 논증이 아니라 호명이 된다. 말하는 사람이 ‘민중’을 부르는 순간, 그 말을 듣는 다수는 본능적으로 선한 편에 서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반대 의견은 ‘민중의 바깥’으로 밀려나기 쉽다. 정치가 가장 즐겨 쓰는 술수 중 하나가 바로 여기서 작동한다.


지지는 ‘느낌’이 아니라 ‘측정’이다

지지는 원래 측정 가능한 행위다. 선거, 여론조사, 공개 토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같은 제도가 있어야 “누가 얼마나 지지하는가”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해방 직후의 한반도처럼 제도가 불안정하고 폭력이 일상이던 시기에는, 지지의 측정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전국 단위의 검증 가능한 여론조사도 없고, 자유로운 경쟁 선거가 사회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는 상황도 많았다.

그런데도 “민중의 지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이유는, 이 말이 ‘증명’이 아니라 ‘분위기’를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어떤 조직이 거리를 장악하고 구호를 선점하면, 그것이 곧 “민중의 지지”로 포장된다. 그러나 거리의 열기와 사회 전체의 지지는 다르다. 열기는 눈에 보이고, 지지는 제도로 확인된다. 이 구분이 무너지는 순간, 정치가 감정과 군중의 파도로 변한다.


해외 사례가 보여주는 교훈

권위주의 체제와 혁명 정권은 거의 예외 없이 “민중”을 자주 호출한다. 이유는 뚜렷하다. “민중”은 선거와 절차를 건너뛰고도 정당성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련과 동구권에서 공산당은 종종 자신을 “인민의 당”으로 규정했고, 반대자들을 “인민의 적”으로 만들었다. 이때 인민의 지지는 수치로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당의 선언으로 규정된다. 반대 의견이 존재할 수 없으니, 지지의 진위를 확인하는 절차도 필요 없다. 중국에서도 “인민”은 국가 권위의 근원으로 반복 호명되지만, 그 인민이 실제로 무엇을 선택했는지 확인할 경쟁 선거는 제한적이다. 말은 ‘인민’인데, 확인은 ‘선언’으로 끝나는 구조가 반복된다.

반대편 극단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파시즘은 “국민”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민족 공동체”라는 추상적 집단 의지를 내세워 반대자를 배제했다. ‘전체의 뜻’이라는 말이 나오면, 절차와 반대, 소수의 권리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용어가 ‘민중’이든 ‘민족’이든, 메커니즘은 닮아 있다. 추상적 집단을 내세워 검증을 건너뛰는 순간, 언어는 정치가 아니라 선전이 된다.

이 해외 사례들은 한 가지를 말해준다. “인민/민중의 지지”가 강하게 등장하는 곳은 대체로 검증 장치가 약한 곳이며, 그 약함을 덮기 위해 언어가 더 뜨거워진다.


‘민중의 지지’는 왜 반론을 봉쇄하는가

이 표현이 실제로 위험한 이유는 논쟁을 끝내버리기 때문이다. “민중이 지지한다”는 말은 ‘나는 사회를 대표한다’는 선언과 함께 온다. 그러면 반대자는 자연스럽게 “민중에 반하는 자”가 되기 쉽다. 그 순간 토론은 실종되고, 도덕 재판이 시작된다.

이 방식은 특히 사법 사건과 결합할 때 폭발력이 커진다. 누군가의 재심 무죄, 억울한 처벌, 국가폭력의 시정 같은 주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도덕적 기반을 갖는다. 그런데 그 도덕적 기반 위에 “민중이 지지했다”는 문장이 올라가는 순간, 개인의 비극은 조직의 정당화로 번진다. 법의 판단(무죄)이 정치의 정당성(지지)으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독자들은 “무죄라면 선하다”는 감정적 연쇄에 매달리게 되고, 그 틈을 선전 언어가 파고든다.

대표님이 문제 삼은 바로 그 지점, 즉 특정 글들이 사회 혼란의 기폭제가 되는 구조가 여기 있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타고 번지는 언어의 방식이 기폭제가 된다.


‘국민’보다 ‘민중’을 좋아하는 이유

대표님 말씀처럼 어떤 세력은 ‘국민적 지지’보다 ‘민중의 지지’를 선호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은 제도를 요구한다. 선거, 절차, 법, 책임, 그리고 소수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반면 ‘민중’은 도덕을 앞세운다. 도덕은 뜨겁고 빠르지만, 절차를 건너뛴다.

‘국민’은 숫자로 확인된다. 득표율, 여론조사, 정책 평가로 검증된다. 그러나 ‘민중’은 숫자 대신 분위기로 말할 수 있다. “현장에 사람이 많았다” “열기가 뜨겁다” “민중이 분노한다” 같은 표현이 쌓이면, 마치 사회 전체가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때 실제로는 침묵하는 다수, 반대하는 다수, 무관심한 다수가 존재해도, 그들은 “민중”이라는 단어 속에서 지워진다. 그래서 이 단어는 정치적으로 편리하다.


소셜미디어 시대, ‘민중’은 더 위험해졌다

오늘날 “민중의 지지”는 과거보다 더 빠르게 확산된다. 이유는 좋아요, 공유, 댓글 같은 지표가 ‘지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리즘이 만든 확산은 대표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특정 커뮤니티와 네트워크 안에서만 폭발한 말이, 사회 전체의 ‘민중’처럼 포장되는 일이 잦다.

좋아요 수가 많다고 해서 그것이 국민적 합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전 언어는 바로 그 착시를 먹고 자란다. “이만큼 좋아요가 있다”는 숫자는 곧 “민중의 뜻”처럼 보이기 쉽다. 검증은 약해지고, 확산은 강해지는 시대. 그래서 ‘민중의 지지’라는 말은 지금 더 위험하다.


결론

‘민중의 지지’는 따뜻한 단어처럼 들리지만, 역사적으로는 가장 차가운 방식으로 사용돼 왔다. 검증되지 않은 대표성을 선언하고, 반론을 배제하며, 책임을 흐린다. 특히 사법적 사건이나 억울한 개인의 비극과 결합할 때, 이 말은 법의 권위를 빌려 정치적 프레임을 확장하는 통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장을 들을 때마다 멈춰서 물어야 한다. 그 민중은 누구인가. 어떻게 확인됐는가. 무엇을 증명하지 않은 채 넘어가고 있는가. 검증할 수 없는 말은 역사에서,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가장 먼저 의심되어야 한다.


다음 회차 예고

2회에서는 “재심 무죄”와 “국가의 서훈/평가”가 왜 같은 것이 될 수 없는지, 법과 이념의 경계를 짚는다. 법이 판단하는 것과 국가가 기억하는 기준은 다르며, 그 차이를 의도적으로 지우는 순간 사회는 다시 프레임 전쟁으로 빨려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