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원 ㅣ 박예슬기자
30·40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크게 늘었지만, 일하는 여성들의 몸과 마음은 충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고용률 상승이 곧 안정적인 일·가정 양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조사 결과로 드러났다.
리서치 및 데이터 인텔리전스 기업 피앰아이(PMI)는 가정의 달을 맞아 전국 만 30~49세 직장인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일·가정 양립 실태와 직장 생활 인식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75.1%가 최근 6개월 안에 번아웃이나 심각한 소진 상태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최근 6개월 내 번아웃 경험 75.1%
번아웃 경험 빈도를 보면 ‘1~2회 경험’이 42.6%로 가장 많았다. ‘3회 이상 반복 경험’은 17.2%, ‘현재도 소진 상태가 지속 중’이라는 응답은 15.3%였다. ‘경험해 본 적 없다’는 응답은 24.9%에 그쳤다. 직장인 여성 상당수가 단순 피로를 넘어 반복적인 소진을 겪고 있는 셈이다.

현재 업무 컨디션을 묻는 질문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확인됐다. ‘다소 피로감을 느끼는 상태’가 46.5%로 가장 많았고, ‘상당히 소진’ 19.0%, ‘한계에 다다른 상태’ 3.6%가 뒤를 이었다. 이를 합치면 69.1%가 현재 업무 컨디션을 소진 상태로 보고 있었다. ‘매우 활기차고 의욕적’이라는 응답은 2.8%에 불과했다.
삶과 커리어에 대한 전반적 만족도도 높지 않았다. ‘보통 이하’라는 응답은 62.1%로, 만족한다는 응답 37.9%를 크게 웃돌았다. 직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충분한 회복과 성취감을 얻는 여성은 많지 않다는 의미다.
두 명 중 한 명은 일·가정·개인 생활 병행 부담
소진의 배경에는 일, 가정, 개인 생활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있다. 직장·가정·개인 생활 병행이 ‘상당히 부담스럽다’는 응답은 32.4%, ‘매우 부담스럽다’는 응답은 18.7%였다. 전체의 51.1%가 병행 자체를 부담으로 느끼고 있었다. 30·40대 직장인 여성 두 명 중 한 명은 일과 생활을 함께 감당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번아웃 원인은 과중한 업무와 인정 부족
번아웃을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은 ‘과중한 업무량 및 시간적 압박’으로 나타났다. 응답률은 22.4%였다. 이어 ‘노력에 비해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 14.9%, ‘성장 정체 및 커리어 발전 기회 부족’ 14.4%, ‘조직 내 대인관계’ 11.3%, ‘일과 사생활 간 경계 붕괴’ 11.3% 순이었다.
이번 결과는 번아웃이 단순히 일이 많아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업무량과 시간 압박이 가장 큰 요인이지만, 인정 부족, 성장 기회 제한, 조직 관계, 퇴근 이후까지 이어지는 업무 환경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이 명확히 나뉘지 않는 상황은 소진감을 더 키운다.
회복 방법 1위는 수면과 휴식
회복 방법은 비교적 분명했다. 번아웃에서 회복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는 ‘충분한 수면 및 휴식’이 33.5%로 가장 높았다.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은 21.0%, ‘운동·산책 등 신체 활동’은 14.0%,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8.5%였다.
이는 직장인 여성들이 가장 먼저 원하는 회복 방식이 특별한 자기계발이나 외부 활동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충분히 자고, 혼자 쉬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관계 회복도 중요하지만, 현재 소진 상태에서는 우선 혼자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절실한 것으로 읽힌다.
인정 욕구는 있지만 성장 기대는 낮다
커리어에 대한 인식도 복합적이었다. 성실히 노력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응답은 58.3%로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향후 임원급으로 성장하는 것을 ‘굳이 원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9.8%,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느낀다’는 응답은 35.0%였다. 두 응답을 합치면 74.8%가 임원 성장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조직 안에서 더 높은 위치로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는 낮은 셈이다. 이는 개인의 의욕 부족으로만 볼 수 없다. 국내 기업 환경에서 여성 리더십 경로가 좁게 느껴지고, 일·가정 병행 부담이 큰 상황에서는 성장 의지가 구체적인 계획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실제로 향후 3~5년 커리어 방향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는 응답은 5.5%에 그쳤다. ‘막연하게 생각해본 적은 있으나 계획은 없다’가 39.1%, ‘대략적인 방향은 있으나 구체적이지 않다’가 38.3%, ‘잘 모르겠다’가 17.1%였다. 상당수가 현재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방향을 명확히 잡지 못한 상태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과 금전적 여유
현재 직무를 맡게 된 이유도 수동적인 응답이 많았다. ‘조직 배치 또는 상황에 의해’가 41.1%, ‘특별한 선택 없이 유지해온 것’이 36.2%였다.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직무라는 응답은 17.0%에 그쳤다. 현재 직장을 계속 다니는 이유로는 ‘생계 유지 및 경제적 안정’이 41.7%로 가장 높았다.
지금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묻는 질문에는 ‘충분한 휴식과 금전적 여유’가 48.6%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스스로에 대한 수용과 자기 인정’ 15.9%, ‘본인을 이해하고 지지해줄 수 있는 관계’ 14.0%, ‘조직 문화 및 근무 환경의 개선’ 11.0%, ‘커리어에 대한 명확한 방향성과 목표’ 10.5%가 뒤를 이었다.
이 수치는 직장인 여성들이 지금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문제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성장과 성취를 말하기 전에 회복할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가정 양립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 업무량 조정, 실질적인 유연근무, 돌봄 부담 분산, 조직 내 인정과 성장 기회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
피앰아이 조민희 대표는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직장인 여성들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누적된 소진 앞에서 성장에 대한 기대와 커리어 방향성을 점차 내려놓고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장 필요한 것으로 휴식과 금전적 여유가 압도적으로 꼽혔고, 회복 방식도 혼자만의 시간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소진이 의욕을 앞서는 시점에 있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여성 고용률 상승은 중요한 변화다. 그러나 고용 확대 이후의 과제는 더 분명하다. 일하는 여성이 직장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래 일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으며, 성장 경로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근무 환경이 필요하다. 이번 조사는 그 과제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실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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